신군부가 정권 찬탈을 호시탐탐 노리던 1980년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갑자기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는 계엄 상태여서 모든 언론이 계엄사령부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는데 한 일간지의 만평은 엿장수가 찌그러진 냄비 두 개를 머리에 쓰고 가위질을 하는 그림에 "엿장수 맘대로"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냈다. 보안사령관이 제멋대로 중앙정보부장 서리 감투까지 쓴 것을 빗댄 것인데 머리 나쁜 검열관이 그 뜻을 모르고 검열을 통과시켜 만평이 나갔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다.그러나 역사를 보면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말도 되지 않는 '엿장수 맘대로' 같은 법률이 적지 않다. 노예는 '3분의 2 인간'이라는 미국의 제헌 헌법 조항이 그러하다. 건국 당시 남부는 노예도 인간이니 노예수만큼 노예 주인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북부는 노예는 인간이 아니므로 투표권을 줄 수 없다고 반박해 헌법 제정이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양쪽이 타협해 생겨난 것이 바로 이 코미디 같은 조항이다.
우리 법률 중 이와 비슷한, '엿장수 맘대로' 법이 민주화운동보상법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제정된 이 법은 독재정권에 탄압받아 온 시국사범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한 법으로 민주화의 중요한 성과이다. 다만 문제는 이법이 민주화운동을 69년 8월 7일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한 행위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4·19 학생혁명, 65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 등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69년 8월 7일 이후의 저항만이 민주화운동이라니, 엿장수 맘대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이 법이 69년 8월 7일에 주목한 것은 이날이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3선 개헌 전의 정부는 민주 정부였고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이처럼 엿장수 맘대로 법이 되고 만 것은 5·16 쿠데타의 당사자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버티고 있어 그와 타협한 결과이다.
지난 주 통과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도 매한가지다. 역시나 딴나라당 같이 행동한 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 위기에 몰렸던 이 법이 빗발치는 여론의 포화 덕으로 기사회생하여 55년 만에 친일청산의 길이 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법은 민주화운동 보상법보다 훨씬 심각한, 엿장수 맘대로 법의 전형이다. 그 결과 이 법을 발의했던 시민단체들의 우려처럼 결과적으로 친일진상규명법이 아니라 친일진상은폐법이 되고 말 것이 뻔하다. 그 이유는 국회가 친일행위자를 소위 이상 일본군 장교에서 중좌 이상으로 축소하는 등 법안을 개악시켜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즉, 똑같이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제국을 위해 봉사한 장교 중 요즈음 중령에 해당하는 중좌 이상은 친일행위자이지만 중위와 같은 그 이하 장교는 친일행위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친일행위자를 장교냐 사병이냐를 기준으로 분류한다면 모를까 중좌 이상이냐, 이하이냐라니, 정말 엿장수 맘대로다. 국회가 이처럼 친일행위자의 기준을 올린 것은 관동군 장교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제국을 위해 복무했던 박정희, 즉 다카기 마사오 일본군 중위에게 친일행위자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가 그 같은 고려를 한 것은 박근혜 의원, 김종필 총재 등이 국회에 버티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좌는 친일행위자이지만, 중위는 아니다?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엿장수 맘대로'의 새로운 사례이다. 하긴 선관위 결정을 마이동풍 식으로 무시하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렇다고 탄핵을 하겠다고 나서는 야당이나 엿장수 맘대로이기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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