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성(남한산성) 내에서는 효종갱(曉鍾羹)을 잘 끓인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와 표고버섯 쇠갈비 해삼 전복을 초장에 섞어 종일 푹 곤다. 밤에 이 항아리를 솜에 싸서 서울로 보내 새벽종이 울릴 때면 재상집에 이른다. 국 항아리가 아직 따뜻하고 속풀이에 더 없이 좋다."1920년대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나오는, 해장국의 일종 효종갱에 대한 설명이다. 양반들이 즐겼다 하여 일명 양반장국으로도 불리는 효종갱은 새벽종이 울릴 때 서울에서 받아 먹는 국이라는 뜻이다. 재상집에 뇌물로 바쳤을 만큼 맛이 기가 막혔던 것 같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술기운을 잡는 데는 해장국이 그만이다.
청진동 해장국은 보통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으로 출발했다. 해장국의 고향 청진동에서도 터줏대감은 청진옥이다. 청진동과 해장국은 등식의 관계다. 서울식의 선짓국이지만 그 역사는 한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지금의 종로구청 일대에는 나무시장이 섰다. 무악재나 동대문을 넘어온 나무꾼들은 서울 한복판 나무시장에 짐을 부렸고 새벽녘 허기진 나무꾼들을 상대로 한 술국집이 청진동 일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존의 술국집 틈을 비집고 청진옥이 문을 연 해는 1937년 8월. 일본인의 차별에 직장을 그만둔 고 최동선(崔東善)옹이 선택한 생업이었다. 올해로 67년째, 벽마다 가득찬 빛 바랜 사진과 기사들이 그 역사를 말해준다.
"처음에는 국밥과 술국을 내놓았고 해장국 격인 술국은 안주로 무료 제공했다고 합니다. 해장국이라는 말은 나중에 쓰기 시작했지요." 최옹의 조카이자 지배인 김창현(金昌鉉·74)씨의 설명이다.
'우리음식 백가지(한복진 지음)'에는 '해장국의 명칭은 원래 술국이었는데 해방 이후에 술로 시달린 속을 풀어준다는 뜻에서 해장(解腸)국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84년 최옹의 타계와 함께 맏아들 창익(彰益·68)씨가 가업을 이었고 동생 창혁(彰爀·58)씨는 청일옥이라는 상호로 독립해나갔다. 청진옥은 3대 째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다.
청진옥의 맛은 고인이 된 안주인 이간난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여사의 손 맛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주재료는 소 등뼈와 사골, 선지, 내장과 양지머리다. 배추우거지 콩나물 대파 쪽파 마늘 생강과 된장은 맛과 영양의 보강재료다. 곱창은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좋지 않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쓰지 않게 됐다.
조리법이야 비밀이지만 어림잡아 설명하자면 이렇다. 토종된장을 풀어 누린내를 없애고 신선한 소의 피에 소금과 물을 알맞게 배합, 맛 있는 선지를 만드는 것이다. 잘 삶아진 선지는 씹는 맛이 찰지다.
"해장국은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음식입니다. 알칼리성 식품에 가깝기 때문에 소화흡수가 빠르고 과음으로 지친 위의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데 효과가 큽니다." 김씨의 입에서는 해장국 전도사 다운 예찬이 쏟아진다. 사실 국물 맛을 좌우하는 뼈에서는 철분, 선지에서는 철분과 단백질이 우러나오는 건강식이다.
63년 포병장교로 제대한 김씨는 청진옥에 들렀다가 도와달라는 외삼촌(최동선옹)의 부탁을 받았다. '잠시'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한 일이 평생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60년대 중반 월남의 미국인회사에 근무한 2년을 빼고는 줄곧 청진옥을 지키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해장국 한 그릇 값은 60원이었다. 자장면 값은 30원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한 그릇에 5,000원이다.
해장국은 골다공증 예방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여성들도 즐겨 찾는다. 일본인의 경우 해장국을 처음 대하고는 대부분 낯빛이 변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맛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그들에게 시커먼 뚝배기에 담긴, 거무죽죽한 해장국의 모습은 혐오식품이나 다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김씨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맛을 보고는 수긍을 한다. 10년 전 일본의 음식전문지가 아시아의 맛 있는 집 326곳을 선정하면서 청진옥도 포함시킬 정도로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이 집의 가장 귀한 손님은 100세가 넘은 이을식(李乙植)옹이다. 전남지사를 지낸 이옹은 47년 김구선생을 모시고 청진옥에서 해장국을 들었고 그 인연으로 김구선생도 청진옥을 가끔 드나들었다. 광복 전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이 자주 찾았고 광복 후에는 이서구 조풍연(문인) 김승호 이예춘(배우) 김정구 고운봉 현인(가수) 등 문화예술인들도 소주 한 잔에 해장국을 들면서 피로를 풀곤 했다. 60, 70년대에는 '고고족'이라 하여 무교동 등 인근의 나이트클럽에서 밤새워 춤을 추다가 통금해제와 동시에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청진동으로 향했다.
한 때 20여 곳이 넘는 전문해장국집이 있었지만 통행금지 해제와 외식산업의 번창으로 영업환경이 바뀌면서 그나마 청진옥 청일옥 흥진옥 등이 해장국 골목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청진옥의 가마솥은 일년 365일 불 꺼지는 날이 없다. 추석이나 설날에도 당연히 문을 연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서다.
이기창 편집위원/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 지방별 해장국
향토의 풍속과 특산물의 영향을 받게 마련인 해장국 역시 지방마다 재료와 조리법이 다르다. 서울의 해장국은 소뼈를 푹 고아낸 국물에 된장을 심심하게 풀고 배추우거지 콩나물 무 등을 넣어 다시 끓인다. 그런 다음 선지를 넣고 또 한번 푹 끓인 일종의 토장국이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에서는 콩나물국밥, 동해안 일대―특히 울진에서는 오징어물회국수를 으뜸으로 친다. 부산은 재첩국이나 복국을 해장국으로 내놓는다.
조풍연 선생 등 서울토박이 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장국 재료도 다소 달라진다. 원래는 소뼈를 하루종일 고아 된장을 풀고 우거지와 콩나물, 감자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냈으며 뚝배기 위에 등뼈를 몇 개 얹어주었다. 요즘처럼 선지나 양을 넣어 건더기를 대신하는 방식은 아마도 한국전쟁 후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의 산물이라는 풀이다.
된장에 얽힌 일화도 재미나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골목마다 된장을 팔라고 외치며 다니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파는 된장은 맛이 없어진 것이었는데 그렇게 모여진 된장은 해장국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그 씁쓸한 맛에 우거지 소뼈 선지의 맛이 어우러져 오히려 독특한 풍미의 해장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해장국의 원조는 성주탕(醒酒湯)이다. 고려말 중국어 회화교본 노걸대(老乞大)는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산초)가루와 파를 첨가한다'고 성주탕, 즉 술 깨는 국의 조리법을 전한다. 조선시대 조리서에는 해장국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풍속화와 문헌에는 그 자료가 남아 있다. 신윤복의 '주막도'에는 술을 마시러 온 한량과, 해장국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앞에서 국을 푸고 있는 주모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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