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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단 한 사람

입력
2004.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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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 지음 열림원 발행·6,000원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단 한 사람'에서)

이진명(49)은 매우 천천히 걸어온 시인이다. 서른 다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그동안 두 권의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와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를 펴냈다. 모두 좋은 평을 받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만에 세번째 시집 '단 한 사람'을 출간했다.

시집을 내면서 이씨는 "나는 살고(그래왔던 것처럼), 살다 갈 것이고/ 나는 시를 쓰고 (그래왔던 것처럼), 시집을 내다 갈 것이다"라고 적었다. 독자에게는 오랜만의 소식이지만 이씨에게는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시 쓰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같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진명의 시는 만져지는 삶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많다. 시 '기찻길 옆 砂金(사금) 노래'는 '학원 하나를 등록해서 나가는데/ 그 학원 있는 곳이 기찻길 옆'이라는 것을 알게 된 데서 나왔고, 시 '지금 안 쓸리는 것은'은 '공동주택/ 밖의 계단을 비질하는데/ 안 쓸리는 작은 덩어리/죽은 나뭇잎 색깔의/ 알 수 없는 덩어리'를 발견한 데서 나왔다.

밥을 짓고 방을 청소하고 이불 빨래를 하고, 우편물을 받고 시를 읽는다. 이런 일상이 시로 쓰인다. 폐암을 앓는 아파트 202호 남자가, 303호가 내놓은 앵두를 얻으러 나온 것을 보고 '앵두와 폐암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연결이 되긴 하는가'('앵두와 폐암'에서)라며 갸우뚱한 고갯짓도 시로 쓰였다. 시인은 자신의 사유가 "별과 진흙 사이를 오르내린다"고 말했는데, 그가 사는 일상은 '진흙'에 속한 셈이다.

고달픔은 일상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별'에 눈을 둔 데서 비롯됐다. "별과 진흙 사이를 오르고 내리며 언제나 그 사이에서 고달팠다"고 말하는 그다. 시는 그렇듯 완전히 속할 곳 없는 고달픔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닦아내는 일상에서 마음의 상처를 닦아주는 이 세상 단 한 사람인 시인의 임무를 깨닫는 것이 그렇다('단 한 사람'). 그래서 그의 시는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독해가 쉽지 않다. 친구 가족과 인사동을 구경하고 자장면을 먹었던 일요일을 쓴 시 '安國(안국)에서 자장면을'에서 다감함보다는 쓸쓸함이 전해지는 것이 그런 한 예다.

'죽 집을 냈으면 한다'에서 그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 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낸다. 살아보니 '이 저녁에도 길에 지친 행인들의 쓰린 속이 보인다/ 세상 폭력이 보인다'. 시인은 '거리거리마다/ 온갖 생고깃집 주물럭집 수산횟집이 난장을 치는 사이로/ 가만히 가만히 끼어서라도/ 죽 집을 냈으면 한다'고 바란다. 물론, '죽 집'은 연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쓰여져 세상의 쓰린 속을 쓰다듬는 '시집'의 다른 이름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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