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다. 나는 그때 업무는 많았지만 보람을 느꼈다.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수업을 하느라 쉴 틈조차 없는데도 동료가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하거나 출장으로 빈 자리가 생기면 대신 수업에 들어가겠다고 자청했다. 그때는 무슨 이유로 내 수업만도 버거운데 남의 수업까지 하려 했을까? 아마 미쳤었나 보다. 그 때는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어 미치고,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미쳤다.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급한 전화벨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학교로 달려 갔다. 결석이 잦은 아이가 있으면 버스도 다니지 않는 동네를 흙먼지 뒤집어 쓰면서도 찾아 갔다. 아이를 만나 토닥토닥 등이라도 두드려 주지 않으면 선생 노릇을 다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고생쯤이야 모른 척했어도 월급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그때도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것도 부족해서 월말고사까지 치렀다. 문제를 출제해서 직접 인쇄까지 마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문제지를 인쇄소에 맡기면 되지만 당시에는 손수 인쇄해야 했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서 퇴근도 잊은 채 밤 새워 글씨를 직접 써가며 출제를 했고 직접 등사실에서 시험지를 밀어야 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전벽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 여인숙 수준의 학교 시설은 호텔급으로 바뀌었고 선생님들의 근무 여건도 놀랄 만큼 개선되었다. 컴퓨터가 개인별로 보급되어 업무 처리가 그만큼 편해졌고, 주당 수업 시간은 대폭 줄었다. 보충수업이나 특기적성 교육을 지도하면 별도의 수당을 받는다.
문제는 선생님들이 누리는 여유가 교사 개인의 행복지수를 끌어 올렸느냐이다. 나는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교사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졌다고 본다.
요즘엔 일부 교사들은 조금만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 주어지면 서로 하지 않겠다고 아우성이고 모든 것을 금전적 보상과 연결짓는다. 동료애, 인화의 미덕은 찾기 어렵다. 여느 직장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인 일터여야 할 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나치게 편함만을 좇는 시대에 추억 속의 장면을 궁상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전상훈·광주제일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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