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학들의 젊은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누구를 인생의 사표(師表)로 여기고, 어떤 책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을까.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라 해도 좋을 서울대 명예교수 57명의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 오롯이 책으로 담겨나왔다.서울대 출판부가 '오늘의 젊은이에게 주는 글'이라는 부제로 낸 '멘토르' 시리즈(전3권)에서 오늘의 서울대를 있게 하고, 그곳에서 최고의 지성을 키워낸 주인공들이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1권 '끝나지 않은 강의'에서 잊혀지지 않는 체험을, 2권 '내 마음의 등불'에서는 자신에게 밤하늘의 별과 같았던 인물들에 대한 회상을, 3권 '다섯 수레의 책'에서는 감동적인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의 스승들
국어학자 심재기(66) 교수는 스스로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빈한하게 살았던 그는 중학교 시절 빵 배달과 담배 목판을 한 고학생이었다. 수업 일수가 모자라 졸업이 불가능했지만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졸업장을 받았고, 대학에서는 이희승 이숭녕 박사를 만나 국어학의 폭을 넓혔다.
보건학자 허정(72) 교수는 "당초 돈 잘 버는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고(故) 김인달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예방의학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그는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쯤 되는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는 쑨원(孫文)의 말을 인용하며 보건 문제를 다루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고 회상했다.
감동받은 책
김안제(67) 환경대학원 교수는 글을 깨치고 정년퇴임하기까지 58년 동안 읽은 책이 모두 2,305권이라며 이를 분석한 통계를 내놓았다. 그가 읽은 소설책 1,364권 중 가장 감명받은 작품으로 꼽은 것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접한 이 소설을 수시로 읽었고, 1994년에는 전집으로 다시 봤다"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용기를 배웠다"고 말했다.
임상심리학의 권위자인 김중술(67) 교수는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딱지 맞은 일화를 떠올리면서 사랑과 결혼 생활에 대해 충고한다. 그는 최근 10여년 동안 읽은 책 중에서 재니스 에이브럼스 스프링의 '외도 이후―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의 고통 치유와 신뢰 재건'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소개한다. "사랑을 하다 보면 나중엔 환상이 죽고, 기대가 죽고, 모든 욕망이 죽는다. 사랑이란 항상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자연의 법칙 속으로 빠지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랑을 온전히 지속하려면 풍부한 상상력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잊지못할 일
국어학자 구인환(75) 교수는 강의 첫날의 감격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첫 강의! 그것은 가슴 벅찬 일이요. 청춘의 열기가 넘쳐 거침없이 앞으로 내디딘 첫길의 첫발이었다. 그 길에 들어선 지 40년, 세월 속에 묻힌 하고 많은 매듭과 사연이 되살아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날의 설렘이 앞선다."
국내 1세대 전자공학자인 이충웅(69) 교수가 전공을 택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똘똘이의 모험'을 들으면서 라디오의 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2극 진공관 원리를 배운 그가 고장난 라디오를 고치면서 부친이 동네방네 소문을 냈고, 운명적으로 라디오를 연구하게 됐다고 한다.
'충실하고 현명한 조언자 즉 스승'이라는 뜻의 멘토르(mentor)를 시리즈 제목으로 단 3권의 책에는 이밖에도 최근 별세한 김진균 교수를 비롯해 임종철(71·경제학) 김윤식(67·국문학) 정진홍(67·종교학) 신용하(67·사회학) 황적인(75·법학) 교수 등 우리 학문 각 분야의 어른들이 그동안 고이 접어뒀던 얘기를 들려준다. 글에서 배어나오는 연륜과 지혜, 또한 그것을 원숙하고 노련하게 풀어나가는 솜씨는 대가들의 인생 답안을 보는 것 같은 감동과 흥미를 함께 준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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