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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지면 귀국 못한다"축구전쟁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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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지면 귀국 못한다"축구전쟁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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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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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월 7일 ● 한·일 축구 해방 후 첫 격돌숙적 한국과 일본 축구 대표팀이 해방 후 9년 만에 스위스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역사적인 첫 대결을 벌였다.

일제 36년동안 단일팀 간의 경기는 많았지만 국기를 달고 맞붙는 것은 처음. 또 한국축구는 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바 있으나 월드컵은 첫 도전이었다.

극동 예선에는 당초 한국 일본과 중공이 편성되었다가 중공이 기권함으로써 한국 일본 양국 중 한 나라가 6월의 월드컵 출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FIFA(국제축구연맹) 규정에 의하면 당연히 양국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 하지만 절대 일본 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따라 두 경기를 모두 적지인 도쿄에서 치렀다.

눈 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 진행된 1차전은 한국이 5-1로 대승. 전반 16분 실점했지만 22분 정남식이 동점골을 터뜨리고 최정민(2골) 최광석 성낙운이 연속으로 골을 추가했다.

이어 1주일 후 가진 2차전에서도 한국은 주전들을 체력과 투지가 좋은 젊은 선수들로 대폭 교체한 일본에 먼저 골을 내줬다가 2-2 무승부를 만들어 종합성적 1승1무로 티켓을 획득했다.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으로 시작된 50년간의 한·일 축구 대표팀 대결은 지금까지 한국이 36승18무11패로 압도적 우위를 기록 중이다.

1986년 3월 8일 ● 빙그레 이글스 창단

82년 프로야구가 6개 팀으로 출범한 후 4년 만에 신생 팀 빙그레가 대전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감독 배성서, 주장 김우열.

빙그레는 첫해부터 한희민 이상군 이강돈등 국가대표 출신 신인들의 패기로 강팀들을 물고 늘어졌지만 1점차 패배가 29차례나 되는 등 뒷심부족을 절감하며 청보와 간발의 차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빙그레는 다음 해 6위로 한 계단 올라가는데 그쳤으나 팀 타율 2할7푼4리로 삼성에 이어 2위를 마크하고 승률도 전년도 2할8푼9리에서 4할5푼4리로 껑충 뛰었다.

신인 이정훈은 3할3푼5리로 타율 3위, 출루율 4위, 도루 7위, 장타율 10위로 공격 전부문 상위에 랭크되고 22게임 연속안타의 신기록도 세웠다. 연습생 출신 장종훈은 주전 유격수 자리를 굳히면서 홈런 8개, 타율 2할7푼으로 거포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다.

빙그레는 결국 김영덕감독이 들어선 88년을 시작으로 89, 91, 92년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94년 구단이 계열사인 한화로 넘어가며 빙그레란 이름과 오렌지색 줄무늬 유니폼은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1969년 3월 6일 ● 안천영 그레코로만형 세계2위

자유형에 장창선이 있으면 그레코로만형에는 안천영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마르텔 플라타에서 열린 제18회 세계 아마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안천영(24·해병대)이 밴텀급 은메달을 획득했다. 3년전 장창선이 자유형 금메달을 땄으나 동구권 선수들이 독무대를 이루는 그레코로만에서는 첫 메달. 자유형은 국내에 1935년 도입돼 54년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국제무대에 진출한 반면 상체만 공격하는 그레코로만형의 역사는 10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안천영 역시 장창선과 같이 가난과 역경을 투지로 이겨낸 선수였다. 당시 세계선수권대회는 선수들이 출전 경비를 부담해야 했으나 4명중 가장 유망한 안천영은 협회와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출전이 가능했다.

전년도 멕시코올림픽 3회전서 우승후보 보즈카 부카야(터키)와의 경기중 갈비뼈를 다치고도 4회전에 붕대를 감고 나가 임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안천영은 이번에는 메달의 향방을 결정하는 3회전 도중 다리 경련으로 기권할 상황까지 몰렸지만 휴식시간에 다리를 핀으로 수없이 찌르고 나와 승리를 따냈다.

그는 72년 뮌헨올림픽 후 은퇴했다. 체력의 한계가 이유였으나 자기 때문에 어느 대회에서나 준우승 밖에 못하는 동생 한영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

이후 미곡상과 제약회사 외판원을 하다 84년 대표팀 지도자로 복귀, 김영남을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고, 90아시안게임에서는 자유형과 그레코로만 감독을 맡아 금메달 11개를 획득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그때 그사람/당시 대표팀 막내 최광석씨

"바로 50년 전 3·1절에 하네다 공항에 내려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워낙 반일 감정이 드높은 때인데다 해방 후 일본과 벌이는 첫 스포츠 대결이라 마치 전쟁을 하러 적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게 지면 현해탄에 모두 빠져 죽으라고 했다'는 말은 나중에 누가 지어낸 것 같은데 사실 그 때는 일본에 패하면 국내에 돌아오기 힘들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최광석(72) OB축구회 부회장은 54년 스위스 월드컵 극동 예선에 참가했던 한국 대표팀의 막내로 1골 1어시스트(코너킥)를 기록했다.

당시 22세. 선수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대표팀에는 39세(박규정), 37세(정남식)의 거의 아버지 뻘 되는 노장도 있었다.

그는 일제 때 경신고 중동고 숭실고 등이 일본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올 정도로 한국인들의 축구 실력이 월등해 승리를 자신했으면서도 워낙 긴장해 두 경기 모두 선제골을 허용하는 등 초반에 고전했다고 회고한다.

일본을 꺾고 귀국할 때 국민들의 환영 열기는 서울 월드컵 때를 제외하고는 가장 뜨거웠을 것이라고.

"군용기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려 열차로 서울에 올라 오는데 부산 대구 대전등 역마다 플래카드를 든 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열차 안으로 사과 곶감등 과일 상자들이 마구 밀려 들어왔어요. 그리고 서울역에서 이기붕 대한체육회장과 광장을 꽉 메운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경무대로 직행했죠.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은 '뭘 원하느냐'고 물었지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사람들이 있어 요구사항은 제대로 못 전하고 끝났어요."

당시 멤버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현재 정남식(87)옹 등 6명이 생존해 있으나 그나마 병석에서 외롭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을 하는 형편.

"우리 때야 운동 할 데가 군대 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뛰어 난 선수라도 밥 먹여 주고 스카우트 할 때 쌀 한 가마 주는 게 최고 대우였으니 경제적으로 윤택할 수가 없었죠."

그는 지금 선수들을 보면 부럽다며 대선배들의 고생이 오늘날 한국축구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하면 고맙겠다고 주문한다.

월드컵 당시 유일한 실업 팀 조선방직에 몸담고, 이후 고려대에서 선수를 했던 최부회장은 60년 현역에서 은퇴 후 심판계에 투신, 두 차례 심판위원장을 역임하며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현재는 40세 이상의 선수출신 모임인 OB축구회 부회장으로서 선배 축구인들을 보살피고, 올해 4년째인 '김용식배 OB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주업무.

그는 요즘 축구계의 문제에 대해 "전국대회 4강 팀에 대입특기생 자격을 주는 제도가 지나친 승부욕과 심판에 대한 불신, 판정 부조리를 조장하는 원흉"이라고 비난하며, "변호사 의사 등이 휘슬을 부는 외국과 같이 우리도 심판을 생업이 아니라 명예로 여기고 그라운드에 서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바람을 밝혔다.

s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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