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과 천생연분이다. 알로에도 일종의 식물이고 보면 내 인생은 꽃·나무와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다.첫 사업인 외국책 장사와 두 번째인 노트공장을 하다 실패한 나는 1957년 초 부산에서 백수로 지냈다. 그러다 초등학교 1년 후배한테 꽃 재배를 배웠다. 최승규란 그 후배는 우장춘 박사의 중앙원예시험장에서 기술을 익힌 정통파였다.
꽃과 나무는 내게 묘한 흥미를 줬다. 단순 기술이 아니라 생명체를 상대로 한 창조 작업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기르는 재미에 빠져든 나는 기술과 이론을 쌓아 나갔다. 그리고 일본의 농과대학 원예 강의록 등으로 학문적 갈증을 풀어나갔다. 토양학과 식물생리학, 농약학 등을 섭렵한 나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전문가 못지않은 기초와 자질을 닦았다.
원예는 취미로 머물지 않고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됐다. 나는 첫 원예작물로 카네이션을 택했다. 당시 카네이션 인기는 대단했다. 재배 2년째인 59년에는 대규모 온실에서 '코오랄'이란 다수확 신품종을 도입, 재배했다. 이듬해 3월 출하 예정이었는데 난방시설 미비로 4월초에야 내놓았다. 카네이션은 금값이었다.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4·19혁명으로 서울 거리는 선혈로 물들었다. 모든 상가는 철시했다. 선금까지 주고 내가 재배한 카네이션을 팔던 꽃집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온실에서 찬란한 자태를 뽐내던 나의 카네이션도 쓰레기 신세가 돼 버렸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은 이내 탄식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품종을 국화로 바꿨다. 그리고 가을 꽃인 국화를 한 겨울에 피게 하는 억제재배에 성공했다. 당시로선 우리나라 최초였다. 또 여름 꽃인 글라디올러스를 봄에 피게 하는 소위 촉성 재배를 시도했다. 역시 이 땅에서의 첫 시험이었고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나는 '레드 래디앤스'라는 진홍색 품종을 택했다. 그때는 붉은 색의 꽃이 가장 잘 팔렸다. 5월초 대규모로 출하된 이 꽃은 값이 비싼데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다. 다시 서울 거리의 꽃집은 철시했다. 대박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4·19때는 그나마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위안을 줬지만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났다. 쿠데타로 손해를 본 것도 한스러웠지만 군인들이 군화발로 이 땅의 민주화를 유린한 것은 더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엔 데코라 라는 새로운 고무나무 3만 그루를 번식,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지금도 데코라는 일반 가정이나 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잎이 넓고 윤기가 잘잘 흘러 잎이 좁고 볼품없는 인도 고무나무를 우리나라에서 거의 내쫓았다.
카네이션과 글라디올러스, 데코라 재배에 성공하기까진 남다른 땀과 눈물, 정성이 필요했다. 온도를 맞추기 위해 보잘 것 없는 보일러와 씨름하느라 2,3시간 밖에 눈을 못 붙이는 건 다반사였다. 출하 날짜를 맞추기 위해 보일러를 고치다 온몸에 작은 화상을 입기도 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집념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도 빼 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김정문 하면 알로에만 생각하지만 열대 과일인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입, 재배에 성공한 사람도 바로 나다. 65년 봄 무렵 인데 '국내 열대 과일 재배 성공'이란 기사가 한동안 매스컴을 장식했다. 이 일로 나는 TBC―TV에 출연했다. 나의 방송 데뷔작인 셈이다.
나는 원예학자일 뿐 성공한 사업가는 되지 못했다. 격동의 사건이 사업을 방해한 면도 있지만 도통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도 마찬가지다. 기껏 국내 재배에 성공했지만 열대지방 나라들과의 구상 무역으로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배와 사과를 열대 국가에 보냈고 그 대가로 이들 과일을 수입했다. 결국 국내성공 첫 사례만 남기고 사업 실패의 쓴 잔을 마셨다. 그나마 나의 파인애플과 바나나 묘(苗)가 제주도로 건너가 10년 후 국내 시장을 석권한 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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