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부터 2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 행사는 학술토론회 후에 정식으로 남북한 학자들 간의 합의에 의해 발족하게 된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양측준비위원회와 학술진흥재단, 고려대 박물관, 한국일보, SBS가 공동주최했다.이번 토론회에는 고대사 전공자들을 포함해 남측의 대학교수와 연구자 등 30여 명이 대거 참가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고구려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이 어떤 상태로 보존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북한 학자들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협의를 하는 자리의 성격도 있었다.
평양성과 조선미술박물관
도착한 다음날인 25일 남측 일행은 평양성에 올라 모란봉과 을밀대를 돌아보며 평양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평양성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평양성은 평시에 사용한 성으로 내성과 중성 및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평양성에 서 보니 이미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고구려 고분과 함께 평양성과 대성산성 등이 있는 역사도시 평양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고구려 고분군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릉비,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등을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신청했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고, 조선미술박물관에서 토론회를 마친 후 한창규 관장의 안내로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조선미술박물관은 1954년에 건립되었는데 30개의 전시실에 8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2층의 제1전시실에는 고구려의 안악 3호 무덤의 회벽에 그린 생활풍속화를 비롯해 강서무덤의 돌벽 위에 그린 사신도 등이 모사전시돼 있다. 1960년대에 전문작가들이 모사한 것으로 매우 수준급이다. 지안(集安) 지역의 고구려 벽화도 모사전시하고 있다. 작년에 서울 코엑스에서 전시된 고분 벽화 모사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자체가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덕흥리 고분과 강서대묘
다음날 우리 일행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덕흥리 벽화 무덤과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보았다. 북측은 처음에는 덕흥리 벽화 무덤은 안된다고 했으나 배려를 해 주었다. 참가자들 모두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제 벽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두 무덤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모형을 만들어 놓아 관람을 시키고 진품은 정형성을 유지하도록 비공개로 보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에게는 정말 흔치 않은 기회다. 우리 모두는 무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덕흥리 벽화 무덤은 묵서명이 발견되어 벽화 제작 시기가 408년임을 확실하게 보여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6년에 우연히 발굴되었다. 무덤 안 돌벽에 회를 칠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앞방 안벽 상단에 14행 154자의 묵서명이 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 자사 '진(鎭)'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북한 학자들은 중국의 유주 지역을 모두 고구려가 관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세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벽화의 주제는 5세기 초의 것이라 생활 풍속을 보여주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니 몇 명이 겨우 볼 만한 넓이이다. 널방에 들어서니 모서리에 기둥과 무덤의 주인과 신하가 그려져 있고, 마굿간과 외양간, 창고 등 평소에 생활하던 모습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천정 부분은 도굴의 흔적이 역력하나 그나마 연꽃이 남아 있어 우리를 반겨주었다.
덕흥리 고분을 본 감동이 식지 않은 가운데 우리는 곧바로 근처의 삼묘리에 있는 강서대묘와 중묘 그리고 소묘 등 강서 세무덤을 둘러 보았다. 남쪽에 위치한 강서대묘는 세 무덤 중 가장 크며 사신도 벽화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봉토의 직경이 자그만치 51m, 높이가 9m나 되는 왕릉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며, 널방의 천장 구조는 삼각고임이다.
벽화는 6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왼쪽 벽에 청룡, 앞벽에 주작 두 마리, 오른쪽 벽에 백호, 안벽에 현무를 돌에 직접 그렸다. 현무의 그림이 단연 압권으로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고임에는 산수와 비선, 서초 등이, 천정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어 왕릉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사신도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 바로 강서대묘의 것이다. 사신도는 덕흥리 벽화와 마찬가지로 유리벽을 세워 만지지 못하도록 차단해 놓았다.
동명왕릉
고구려 유적에 대한 순례는 다음날인 27일에도 계속됐다. 아침 일찍부터 평양 시내에서 28㎞ 떨어진 동명왕릉으로 향하였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으며, 정릉사 구역과 동명왕릉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정릉사 구역은 중문을 지나 가운데 7층탑이 있으며, 왼쪽에 극락전, 오른쪽에 용화전, 앞쪽에 보광전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부터 3년 간 발굴을 하였는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다. 널방의 벽에 회를 칠하고 그 위에 연꽃을 그렸는데 네 벽 모서리에는 자색의 기둥 자국이 남아 있다. 왕릉 뒤편의 진파리 고분군은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무덤을 비롯한 고구려 장군과 신하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예컨대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그림의 주제가 여성적이라는 것이며, 무덤에서 칼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남북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해야 할 과제들이 상당히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최 광 식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 고려대박물관장 ●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남북역사학자들의 생각
서울에 돌아오는 28일 오전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은 다시 모여 양측 실무진이 수 일 동안 논의해 온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구성하기로 드디어 합의하고 합의서를 교환했다. 분단 이후 학술 부문에서 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공동연구와 토론회, 자료교환 및 전시회 등의 활동을 정례화하고 적극 확대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공동모색하기로 의견을 나눈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하겠다. 북한 학자들은 중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드러내놓고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나서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따라서 남과 북이 이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공동대처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학술토론회 방식보다는 남북학자들의 공동조사와 공동연구, 그리고 고구려 유물전시회 같은 방법이 강구될 수 있다.
고려대 박물관과 조선미술 박물관이 최근 서울에서 함께 전시회를 가진 것도 남과 북의 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한 최초의 전시회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