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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제임스 본드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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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제임스 본드의 반란

입력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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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서부 온천 휴양지 첼튼엄(Cheltenham)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18세기 이래 국왕 조지 3세와 웰링턴 장군이 요양차 머물 정도로 고아(古雅)한 정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인구 10만의 이 곳에는 외국 관광객은 무심히 지나치는 세계적 시설이 있다. 공식명칭이 정부통신본부(GCHQ)인 비밀감청시설이다.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첩보위성 등 온갖 수단으로 전 세계에서 가로챈 방대한 통신을 세계 최대 슈퍼 컴퓨터로 검색, 정보를 가려낸다. GCHQ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대외정보국 MI6과 더불어 영국이 첩보왕국 명성을 지키는 바탕이다.■ 지난해 1월 말,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유엔 안보리이사국 대표단의 사무실과 집을 도청한 자료를 분석해 줄 것을 GCHQ에 요청하는 비밀메모를 보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국측은 앙골라 카메룬 기니 불가리아 칠레 파키스탄 등 영국이 조예가 깊은 나라들을 지목했다. 목적은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사국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극비메모가 영국의 주간 옵서버 지에 폭로됐고, 개전을 앞두고 민감한 폭로에 놀란 두 나라는 대대적인 '두더지 잡기'를 벌여 지난해 6월 범인을 찾아냈다.

■ 범인은 GCHQ의 중국어전문 분석가 캐서린 건으로, 29살 된 여성이었다. 정부가 불법적인 전쟁을 위해 유엔을 상대로 불법활동까지 벌인 것을 고발하려는 동기였다. 이 사건은 스파이 조직원이 여왕폐하에 대한 충성의무를 저버린 '제임스 본드의 반란'으로 불렸고, 검찰은 11월 그를 공공기밀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사건은 개인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정부와 정보기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됐다.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큰 영국 정보기관은 블레어 정부가 정치목적으로 이라크 정보를 왜곡하는 등 정보활동의 진정성과 정치 중립성을 훼손한 데 반란을 감행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 지난주, 미국과 영국이 유엔 사무총장까지 도청했다는 폭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영국 검찰은 캐서린 건에 대한 기소를 취하했다. 불법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피고인의 항변을 논박하기 어렵고, 정치적으로도 전쟁의 불법성이 새삼 논란되는 것을 꺼린 결정으로 풀이된다. 캐서린 건은 "영국 정보기관이 유엔의 민주적 절차를 해치는 행위에 가담하는 경악스런 상황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기관은 일개 정부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교훈을 일깨운 용기있는 스파이로 기억될 것이란 평가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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