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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44>明洞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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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44>明洞 선언

입력
2004.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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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가 나라 전체를 병영화하고 있던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 미사 및 기도회 끝머리에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됐다. 민주주의 회복과 민족 통일 정책을 촉구한 이 선언의 서명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신구 기독교 성직자이거나 신자인 재야 명망가 10명이었다.당초 이 사건은 3·1절이나 광복절에 으레 나오곤 했던 종교계의 시국 선언 가운데 하나로 치부돼 가볍게 넘어갈 듯한 분위기였으나, 이튿날 아침 국무회의에서 서명자 명단에 김대중이 끼여 있는 것을 알게 된 박정희의 노발대성 뒤 정부 전복 음모로 비화했다. 서울 지검은 이내 구정치인들과 일부 재야 인사들이 종교 행사를 빙자해 정부 전복을 선동했다며 서명자 전원과 선언문 제작에 관여한 문익환 이해동 이태영 함세웅 문정현 김승훈 등 모두 18명을 기소했다. 윤보선 함석헌 이태영을 비롯해 고령과 여성이라는 이유 등으로 구속을 면한 7명을 제외한 구속 기소자 11명 전원은 그 해 12월29일 결심 공판에서 징역 5년까지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명동 선언은 1970년대에 흔했던 명망가 중심 민주화 운동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명망가들의 참여 덕분에 나라 안팎에 큰 파장을 만들어냈다. 재판 과정에서 유신 체제를 놓고 벌어진 정치적·법률적 논쟁은 외국 언론에까지 보도됐고, 재야와 비주류 정치권, 기독교의 신구교,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사이의 연대가 한국 민주화 운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또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또 1973년 8월 망명지 일본에서 납치돼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정권의 집중적 견제 탓에 제도 정치권에서 배제돼 있던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재야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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