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엔 안보리의 이라크 결의안 표결 과정에서 영국 정보기관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도청했다는 클레어 쇼트 전 영국 국제개발장관의 폭로를 계기로 미영 정보기관의 유엔 외교관 도청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27일에는 한스 블릭스 전 유엔 무기사찰단장도 재임시 도청 당했다는 보도가 나와 향후 사태가 어떻게 발전할 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프레드 에커드 유엔 대변인은 26일 정례브리핑에서 "도청은 유엔을 불가침지역으로 규정한 조약 등에 위배된 불법행위이다. 이는 곧 외교적 의견교환이 갖는 비밀스러운 성격을 침해하게 된다"며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에커드 대변인은 "유엔 본부의 통신보안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호주 ABC방송은 27일 익명의 정보요원의 말을 인용, "한스 블릭스 당시 유엔 이라크 무기사찰단장도 휴대폰과 전화통화가 도청 됐으며, 그의 대화기록이 미국과 영국 등에 보내졌다"라고 보도했다.
국제사회로부터는 미영 정보기관이 이라크전 강행을 위해 대량살상무기(WMD) 정보 조작과 함께 각국 외교관에 대한 무차별 도청까지 감행하는 등 온갖 '더러운 속임수들'(dirty tricks)을 총동원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가 WMD를 은닉하고 있다"면서 전쟁준비명령을 내린 뒤 유엔 안보리의 이라크전 결의안 통과를 위한 전방위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3월 중순으로 예정된 안보리 표결을 갑자기 철회하고, 일방적으로 이라크전쟁을 감행한 것은 도청활동 등을 통해 결의안 통과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외교 전문가들은 "유엔 본부 소속 외교관에 대한 도청은 관례"라고 거들며 미국과 영국의 도청을 기정 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은 "사무총장의 사무실과 집은 기술만 있으면 언제나 도청이 가능했다"면서 "이는 불행하지만 현실"라고 설명했다. 리처드 버틀러 전 유엔 이라크특별위원회 위원장도 최근 호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1990년 대 후반 이라크와 미묘한 국제협상을 할 때마다 내 휴대폰과 전화가 도청 당했다"며 "쇼트 전 장관의 폭로는 전 세계가 국제외교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파문이 확산됨에 따라 내년 상반기 총선을 앞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나 11월 대선이 예정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다시 곤경에 몰리게 됐다. 특히 도청파문의 중심에 있는 블레어 총리는 이미 영국 내에서 뜨거운 비난여론에 직면해 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와 가디언지는 '영국의 도청은 수치', '우리가 아난을 도청했나'라는 제목의 부정적인 기사를 각각 게재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블레어 총리가 얼마나 오래 상처를 입을 지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야당은 물론 노동당 내부의 비난강도도 점점 드세져 블레어가 이라크전의 그늘을 벗지 못하고 낙마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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