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휴대폰부터 수첩을 묶고 있는 철제 스프링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는 모두 철에서 비롯된다. 우리 나라의 철기시대는 어림잡아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됐다는데, 우리 조상들이 철을 만드는 모습은 교과서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용광로와 거기서 흘러나오는 뜨겁고 끈적끈적한 철은 우리나라 고유의 방식이 아니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구식 용광로를 일제시대 이후 들여와 쓰기 시작한 것. 그 전까지 철을 만드는 일은 도자기를 굽는 것처럼 장인들의 몫이었다. ‘제철(製鐵) 장인’의 모습이 어쩐지 낯선 것은 철과 그 제품을 공들여 만들던 이들이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고, 제자를 키우거나 비법을 전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가르쳐줄 스승도, 제대로 된 자료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전통 철 제조법을 복원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고군분투하는 장인이 있다. 경기도 양주의 집에 손수 설치한 용광로에서 작업하며 묵묵히 전통 철을 만들어내는 이은철(48)씨. 그는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철, 그리고 칼에 평생을 바친 것일까.
서구식에 밀려 사라진 전통철
“장손으로 태어나 어릴 때 흙 한번 밟지 않고 귀하게 자랐습니다. 철 만드는 일에 미쳐 자식도 낳지 않고 있으니, 집에서 핍박이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 되시죠. 그렇지만 지금 제가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전통 철은 영원히 사라질 텐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씨가 칼과 철을 만들게 된 사연은 다소 엉뚱하다. 7살 때 작은 아버지가 연극 소품으로 만든 멋진 모형 칼을 다른 이에게 줘버린 ‘충격적 배신’을 겪고 난 후 오기로 칼을 만들기 시작, 지금까지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무를 깎아 장난 삼아 만들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업은 점점 진지해졌다.
칼을 만들다 보니 관심이 재료인 철까지 옮겨갔다. 박물관에서 본 조상들의 칼이 지금의 철과 다른 색상과 질감을 지녔다는 사실이 그를 자극했다. ‘그렇다면 저 철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은 곧 ‘아무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절망적 답을 만났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제철소가 들어오면서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한 전통 철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무인(武人)과 칼을 천하게 여겼던 ‘붓의 나라’였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지키려는 시도도 없었던 거죠. 그렇게 전통 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더군요.”
스승 없이 연구해 상처 투성이
충격을 받은 이씨는 1986년 초부터 작은 전통 제철소가 있던 곳을 찾아 다녔다. 그 곳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유출제와 ‘로(爐)’의 조각들을 연구하면서 이씨는 수많은 좌절을 겪었다. 철 만드는 방법을 아예 처음부터 발명해야 하는 고대인이 된 기분이었다. 2년 전 한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이씨의 오기에 불을 질렀다.
“전통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로에서 철이 성공적으로 제조됐음을 알리는 ‘쇠똥’이 철철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전 방식을 이어오면서 그 철로 칼, 찻주전자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쓰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죠. 절대 포기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알아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칼을 만든다고는 하나, 팔려는 것이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수입은 전혀 없었다. 집에서 물려받은 돈을 조금씩 빼 쓰면서 로를 제작하고 각종 재료를 여러 방법으로 조합했다. 실패는 이어졌다.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몇몇 박물관과 학자들이 제철 작업에 합류했지만 전망이 불투명하자 오래 버티지 못했다.
“도움말을 줄 수 있는 이가 없어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당했습니다. 인대가 끊어져 몇 개월동안 작업을 중단한 적도 있었어요. 화상이나 베이는 것은 사고로 치지도 않죠.”
군소리 없이 묵묵히 돕는 아내와 단 둘이 작업을 계속한 결과 지난해 12월27일, 이씨는 드디어 전통 방식의 제철에 성공했다. 처음 철에 관심을 가진지 17년 만이었다. 유출제가 흘러나올 때의 감동을 묻자 “나올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며 조용히 웃는다.
전통 제철, 무형문화재 지정됐으면
평생 칼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는 말에 사람들은 이씨의 집이 ‘도검(刀劍) 박물관’ 수준이 아닐까 짐작한다. 예상과 달리 그가 가진 칼은 다섯 점이 채 되지 않는다.
“칼을 쌓아두려고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치에 이르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죠. 완벽하지 않은 칼은 바로 부러뜨리고 설령 완벽하다 해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바로 폐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칼은 만드는 공정 자체에 가장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이씨가 말하는 절대치는 두 가지로 나뉜다. 원료를 가장 정확하게 배합해 만들어내는 ‘금속학적 절대치’와 눈으로 보아 아름다운 ‘공예적 절대치’가 그것이다. 철 자체가 불순하면 색상이나 무늬도 거칠어지므로 무엇보다 금속학적 절대치가 우선한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일년에 나오는 칼의 수는 4~5점. 이른바 ‘보검(寶劍)’은 2~3년씩 걸리기도 한다.
“서양식으로 만든 철은 석탄 원료를 사용해 유황과 인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목탄을 사용하는 우리 방식은 공정이 훨씬 복잡한 단점이 있지만 매우 깨끗한 철을 생산해냅니다. 철이 깨끗하다는 것은 곧 강하다는 뜻이죠.”
우연히 얻은 성공이 아니었기에 이제 철을 얻어내는 일도, 절대치에 달한 칼을 만드는 일도 그에게는 큰 어려움은 아니다.“저를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사회의 무관심입니다. 일본만 해도 제철 장인 양성소가 있고 유명한 장인은 국보급 인사로 지정해 예우합니다. 저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칼을 팔아본 적이 없어요. ‘칼 장수’가 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때문이죠.”
이씨는 그의 작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해주길 바란다고 거듭 강조한다. 만약 지금 그가 힘들어서 포기하게 된다면 어렵게 얻어낸 귀중한 결과물은 또 다시 컴컴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제철 과정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소중한 문화 유산입니다. 지금까지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다다른 만큼 이제는 제도권 안에서 제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전달하고 싶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지금이라도 국가에서 관심을 가져주세요.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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