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과 이이(李珥), 퇴율(退栗)로 더 잘 알려진 두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훌륭한 교육자이다. 성공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분명 비범한 인간이었지만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황과 이이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지폐에 새겨서 기릴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인'의 무게를 걷고 그들이 성취하려 했던 삶의 지표를 되짚어 볼 때 이황과 이이의 진면목에 다가설 수 있다.'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에서).
'고산(高山) 구곡담(九曲潭)을 살람이 몰으든이/ 주모(誅茅) 복거(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무이(武夷)를 상상(想象)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중에서).
이황이 따르겠다는 고인은 누구일까? 요순, 공자와 같은 유가의 성인이다. 이이가 해주에서 은거를 계획하며 배우고자 한 대상은 무이정사(武夷精舍)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던 주자였다. 이황과 이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이상으로 삼던 유학자였으며, 주체의 정신적 완성을 통해 성인의 길을 가고자 했다. 다만 입지(立志)에서 성도(成道)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그 선택은 동일하지 않았으며 문학에 대한 입장, 시의 세계도 달랐다.
이이의 천재성을 염려한 이황
이황과 이이가 처음 만난 때는 이황이 58세, 이이가 23세인 1558년(명종 13년) 이른 봄이다. 이이는 성주목사였던 장인 노경린을 뵙고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禮安) 도산(陶山)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황은 50세인 1550년 2월,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거처를 정하고 한서암(寒栖庵)을 지었다. 도산서당이 낙성된 것은 60세인 1560년 11월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삶의 여러 굴곡을 거친 노학자와 방황의 시간을 마치고 거친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가려는 청년의 해후였다. 35세라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이 학문, 세상이 놀라고 의심하였네(從來此學世驚疑)/ 이익을 위해 경서 읽는다면 도에서 더욱 멀어지리(射利窮經道益離)/ 감격스러워라! 그대만이 홀로 깊이 뜻 이룰 수 있어(感子獨能深致意)/ 사람들 그대 말 듣고 새로운 앎 얻으리(令人聞語發新知)' ( '퇴계집 권2' 에서).
'도를 배우면 어떤 사람도 의혹이 없어지게 될까(學道何人到不疑)/ 병폐의 근원, 아! 내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네(病根嗟我未全離)/ 접대에 응하여 차가운 계곡의 물 마시니(想應捧飮寒溪水)/ 마음과 몸, 시원해짐을 알겠네(冷澈心肝只自知)' ('율곡전서 권14'에서).
이황은 이이를 '문장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첫 눈에 이이의 지식과 견문을 알아 본 이황은 일부러 시를 주고받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사대부가 만나면 으레 시문으로 속내를 드러내던 당대의 관행을 무시한 것이다. 이황은 이이의 천부적인 영민함, 넘치는 문학적 재능이 도학자로 대성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을 염려했다. 이미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수양과 교육의 길을 선택한 노성한 학자에게 험한 파도 앞에 선 젊은이의 모습은 위태롭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별시 장원하며 현실 참여 택한 이이
떠나던 날 아침 눈이 내려 시를 짓게 하니 이이는 그 자리에서 두어 편 시를 지었다고 한다. 위의 작품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이이는 금강산생활과 그 후에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정신적 방황을 고백하고 자문을 구했다. 그는 학문을 통해 깊은 삶의 의혹을 풀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만남 직후 강릉에서 보낸 이이의 편지에는 '불교 서적의 중독'에서 벗어나 '대학' '중용' '심경'에 천착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이황은 편지를 받고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의 주자학적 학문 방법을 권했다.
평소 이황은 제자들에게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거 공부와 명예를 낚으려는 문장 연마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젊은이가 삶에 대한 깊은 반추없이 입신양명에 급급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처사형 지식인, 철학자가 다수 배출 된 것은 이런 교육관의 영향이다. 이에 반해 이이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현실정치권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과거공부의 현실적 필요성, 불가피성도 인정했다. 이황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그 해 겨울 명문장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別試)에서 장원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길을 선택해 간 것이다.
달밤에 옷깃에는 매화 향기 가득
문장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이황 자신도 대단한 문학애호가였다. 그는 제자 정유일에게 보낸 시에서 '시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 스스로 그릇된다(詩不誤人人自誤)'고 하면서 흥과 정이 오가는 상황에서는 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황은 시 창작에 있어 한 구, 한 자를 신중히 생각하고 가다듬어 발표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 대응하여 심미적 완성도도 높다. 이황은 문학을 통해 작가와 독자의 내면이 순화되는 온유돈후(溫柔敦厚)의 효용을 추구했다. 그의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청정(淸淨), 고아(高雅)의 이미지는 주리(主理)철학의 시적 대응으로 인욕을 초탈한 정신의 절대 자유이며 종교적 열락의 경지이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步 中庭月 人)/ 매화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梅邊行 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夜深坐久渾忘起)/ 옷깃에 향기 머물고 달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香滿衣巾影滿身)' ('퇴계집 권5'에서).
달밤에 매화 주변을 거닐면서 달빛과 매화 향에 심취한 이황의 모습이 선연하다. 이황과 매화와의 관계는 감상 주체와 완상물의 수준이 아니었다. '고종기(考終記)'에 의하면 이황은 임종을 앞두고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여 마치 오랜 친구와 영결하듯 했다. 이황은 매화를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고 자신은 도선(陶仙)이라 칭하여 둘의 사이를 지기(知己)로 표현했다. 고졸하고 청아한 매화에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이상적 인간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도연명의 국화, 주렴계의 연꽃처럼 이황에게는 매화가 정신적 높이의 형상물이었다.
연잎 위에 구슬 서너 개 구를 무렵
이이의 시에는 이황에 비해 도학적 분위기가 옅다. 그 대신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주변의 경물을 대상으로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표출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이이의 시는 관념적이라기보다는 서경적, 즉물적 경향이 강하다.
이이는 문학의 최고 경지를 '선명(善鳴)'이라 했다. 그는 독자보다 작자의 측면에서 접근해 기(氣)의 작용으로 나오는 소리 중에서 올바름에 부합하는 대목을 골라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는 38세에 편찬한 중국 시선집 '정언묘선(精言妙選)'의 제1권을 충담소산(沖澹蕭散)의 풍격을 지닌 고시를 중심으로 묶었다. 가식과 기교에 힘쓰지 않고 작가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담박한 작품을 추구한 것이다.
'구름이 푸른 산 둘러 반쯤 삼켰다가 뱉더니(雲鎖靑山半吐含)/ 갑자기 비가 흩날려 서남쪽을 씻어 주네(驀然飛雨灑西南)/ 어느 때 가장 시상을 재촉하던가(何時最見催詩意)/ 연잎 위의 구슬 두서너 개 구를 무렵(荷上明珠走兩三)' ('율곡전서 권1' 에서).
'시를 재촉하는 비(催詩雨)'라는 멋진 제목이 붙은 작품이다. 푸른 산에 머물렀던 작가의 시선이 날리는 빗줄기를 따라 연 잎위의 빗방울로 옮겨지면서 시상이 구체화했다. 이이의 시에는 구체적 현실 상황에서 생성된 순간적 감흥의 포착과 감각적인 묘사가 많다. 경세지향적(經世指向的) 가치관에 대응해 그의 문학에는 현실의 다양한 인정세태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다.
이황이 깊은 사유와 결합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구도의 길을 표현했다면, 이이는 부딪치는 일상사를 창작의 계기로 삼고 실행의 과정을 시화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 그들 문학의 중심에는 도학적 감수성, 규범적 미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주 만물과 인간에 내재된 이법(理法)을 형상화하는 길은 다양하다. 이황과 이이처럼 시안(詩眼)의 방향, 그 높낮이가 달라지면서 도학문학의 세계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우응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이황
1501년(연산군 7년)에 태어나 1570년(선조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진보(眞寶), 호는 퇴계(退溪). 28세에 진사 회시에 급제했고 43세에 은거를 결심한 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 이이
1536년(중종 31년)에 나서 1584년(선조 17년)에 타계했다.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율곡(栗谷)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아홉 차례 과거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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