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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테니스 대표팀 "中共"입국… 한중 교류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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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테니스 대표팀 "中共"입국… 한중 교류 신호탄

입력
2004.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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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월 25일● 쿤밍서 데이비스컵 동부지역 예선 한중전

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대회가 중국의 두꺼운 장막을 벗겼다.

84년 데이비스컵 동부지역 예선 2회전 한국-중국전(3월2∼4일)의 홈팀인 중국은 당초 이 경기를 제3국인 홍콩에서 갖는 방법을 ITF(국제테니스연맹)에 제안했지만 결국에는 대회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ITF의 압력과 베이징이 90년 아시안게임 유치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 사상 처음 한국 선수단에게 문을 열었다.

한국 선수단 8명은 대한테니스협회 부회장인 김덕영 단장과 김문일 감독, 김춘호 이우룡 송동욱 김봉수 유진선 노갑택 선수. 이들은 홍콩에서 비자를 받은 후 중국민항기를 타고 대회 장소인 쿤밍(昆明)으로 들어갔다.

한국 선수단이 중국의 공식 초청에 의해, 더욱이 중국 여객기를 타고 입국한 것은 양국 교류를 급진전 시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중국 관리들은 북한에 주는 자극을 줄이기 위해 베이징에서 2,000㎞ 떨어진 남서지방의 쿤밍을 경기장소로 정했다고 밝혔다.

경기는 초청된 관리, 보안 요원, 대회 관계자들만이 보는 가운데 교외의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됐으며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 등 관례적인 의식은 생략되었다.

한국은 단식에서 송동욱 김춘호 유진선이 모두 지고 복식(유진선-김봉수)만 승리, 종합전적 1-4로 패했다.

1987년 3월 1일

● 양영자-현정화 뉴델리대회 우승

'환상의 콤비' 양영자(23)-현정화(18)가 뉴델리 3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복식 결승에서 중국의 다이리리-리후이펀 조에 3-1로 역전승, 정상에 올랐다.

73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이 활약해 단체전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나 개인전 우승은 처음. 예리한 서브에 이은 파워 드라이브의 양영자, 전진 속공의 여고생 현정화가 짝을 지은 지 단 10개월 만에 만들어 낸 쾌거였다.

이미 83년 도쿄 세계선수권에서 중국 선수 3명을 내리 물리치며 결승까지 올라 사상 첫 단식 준우승을 이루었던 에이스 양영자는 이 대회서 단체전과 단식 은메달, 혼합복식 동메달 등 4개종목 모두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양영자는 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현정화와 함께 중국을 꺾고 단체전 우승을 만들낸 후 중국의 아시아선수권에서는 간염으로 개인전을 포기했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상태이어서 세계선수권대회의 분전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둘은 상승세를 계속, 88년 올림픽에서도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여자복식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양영자는 89년 1월 체력의 한계로 은퇴, 제일모직의 트레이너를 거쳐 97년 목회자인 남편, 두 딸과 함께 몽골로 가 고비사막 오지에서 현지인들에게 탁구를 가르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1988년 2월 23일

● 김기훈 캘거리 올림픽 1,500m우승

15회 캘거리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선을 보인 쇼트트랙에서 김기훈(21·단국대2)은 남자 1,500m 우승을 차지, 올림픽 금메달 행진에 시동을 걸었다.

시범종목은 메달집계에 들어가지 않으나 시상은 정식종목과 똑같이 실시해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 애국가가 울렸다.

강한 집념에 코너웍과 지구력이 뛰어난 그는 89 동계유니버시아드 3관왕, 90 동계아시안게임 3관왕, 91동계유니버시아드 4관왕에 이어 92년 알베르빌올림픽에서는 1,500m와 5,000m 계주 금메달을 추가했다.

한국이 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이후 정식종목 첫 금메달이었다. 김기훈은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도 1,000m를 석권해 이 종목 2연패, 88년 시범종목부터 치면 3대회 연속 금메달 획득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양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과 달리 오른 발 하나로 코너를 도는 외발타기 주법이 특기였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당시 대표팀 감독 김문일

"꼭 20년이 됐군요. 84년 2월 데이비스컵 감독으로서 중공 땅을 밟을 때는 마치 별나라에 가는 기분이었어요. 역사적인 순간과 장막에 가려있던 대륙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공항에 내리기 전부터 소형 녹음기를 입에 대고 계속 중얼거렸죠. 경기를 이겼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쿤밍이 워낙 고지대라 볼이 1m씩 더 나가는 바람에 애를 먹었습니다."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감독 출신으로 92년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 화제가 됐던 김문일(57)씨는 이후 보험업계 야전사령관을 거쳐 현대해상화재보험 계열의 (주)경일산업개발 최고경영자로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었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테니스계 최고의 행운아'이다. 골프가 널리 보급되지 않고 테니스가 고급 스포츠로 대우 받던 67∼78년 대표선수를 지내고, 75년에는 법조계 동호인이 주축이 된 '벽제구락부'의 후원으로 6개월간 호주유학을 가 '서브 앤 발리' 라는 선진기술을 배워 국내에 선을 보였다.

80년대에는 현대중공업 감독을 맡아 김춘호 이우룡 송동욱 노갑택 등의 스타군단을 이끌었으며, 92년 14대 총선 때는 국민당 대표인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부름을 받아 전남 곡성·구례에서 출마하기도 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이 아니면 당선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과 같은 정주영 회장이 '나라를 위해 일 하자'니까 태극기를 달고 운동했던 사람으로서 가슴 뭉클하며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그는 우연치 않게 전국에서 가장 먼저 연설회를 갖게 돼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단상에서 라켓을 휘두르는 모습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곡성에서 태어나 이 라켓 한 자루로 대한민국을 제패하고, 아시아를 정복했습니다. 운동할 때의 노력과 정열로 농촌을 잘 살게 만들겠습니다. 우리 농민을 돕지 않으면 장관이라도 이렇게(스매싱 포즈를 하며) 혼을 내겠습니다."

"죽기 살기로 뛰었지요. 주위에서 당선이 된다고 말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직접 득표로는 연결되지 않더군요."

전남·북에서 국민당 후보 중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15%)을 기록한 것으로 자위한 그는 테니스 감독에 복귀했다가 구조조정 바람이 한창이던 98년 현대해상의 호남본부장으로 발령 받았다. 주변에서는 회사를 그만 두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평생 운동만 한 사람이 어찌 보험 영업을 지휘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1,300명의 직원을 이끌고 3년 연속 전국 9개 본부 중 1위를 차지했다. "테니스를 하면서 쌓은 인맥이 큰 도움이 됐지요. 그리고 시간을 아껴가며 실질적으로 영업에 도움이 되는 사람만 만나고 다녔어요. 골프를 가서도 경차를 가진 캐디를 상대로 열심히 영업을 하니 골프장 사장까지 나서서 도와 주더군요."

3년 전에는 현대해상의 사옥을 관리하는 경일산업개발의 대표이사로 영전했다.

김사장은 취임 후 사업대상을 외부의 인텔리전트 빌딩들과 백화점 호텔 병원 등으로 넓히고 파견근로사업, 임대차 관리사업을 추가했다. 첫 해에 목표의 두 배인 2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후 3년째인 지난해에는 350억원으로 늘렸다. 내년에는 500억원이 목표. 직원도 600명에서 1,700명으로 늘었다.

테니스계에서 친화력과 뚝심으로 인정 받았던 그는 자신의 변신에 대해 "감독시절 선수 하나 하나의 식성까지 꼼꼼히 챙기면서 서비스 정신이 밴 것 같다. 예술종합학교를 나와 줄리어드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딸이호텔경영과 요리분야의 명문인 미국 존슨&웨일즈 대학에서 푸드 서비스 매니지먼트를 전공하고 돌아 와 대기업이 운영하는 외식업체의 부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다. 역시 핏줄에 서비스업의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딸 자랑을 곁들여 자신의 비결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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