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만큼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기록을 갈아치운다'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도 없다. 충무로는 '실미도'(감독 강우석)의 관객 1,000만명 돌파 기록에도 놀랐지만, '태극기…'에는 더욱 놀라고 있다. 과연 '태극기…'가 어느 정도 빨리 '실미도'가 세운 각종 기록을 경신할까, 현재로는 그럴 가능성이 없지만 아니면 잘 달리다 갑자기 멈추는 건 아닐까.5일 개봉한 '태극기…'는 '실미도'의 모든 기록을 하나하나 깨뜨리고 있다. 한국영화 사전 최다 예매량(7만3,000장·실미도 6만9,000장), 개봉 첫 주 최다 관객(177만7,466명·실미도 158만명), 최단기간 500만명 돌파(개봉 13일째·실미도 19일째) 등. 셈만 꼼꼼히 하면 거의 모든 게 기록이다. 개봉 15일째인 19일 현재 누적관객 수는 543만8,942명. 하루 30만명씩 극장을 찾는다. '실미도'의 한 출연배우가 "참 무섭대요. '태극기…'가 개봉하고 '실미도'의 1일 관객 수가 반으로 줄었으니까요"라고 말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태극기…'의 흥행요인은 무엇보다 첨단 컴퓨터그래픽으로 태어난 스펙터클한 전쟁 장면 덕분. 2만명을 훌쩍 넘긴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 대부분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하며 열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20, 30대에게는 역사 교과서에만 숨어있던 한국전쟁이 살아 숨쉬는 현재형으로 다가왔고, 40∼60대에게는 나이든 형제나 부모 또는 자신이 직접 겪은 당시의 혼란과 상처가 생생히 되살아 났다.
나약한 동생(원빈)을 위해 물불 안 가린 장남 진태(장동건)의 눈물겨운 형제애도 빼놓을 수 없다. '태극기…'의 매력은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동생과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대한민국 장남의 모습을 만나는데 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태극기…' 의 치명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택했지만, 그 실체적 진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멀리했다. 오로지 팔과 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가는 참혹함과 생생함만으로 한국전쟁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가 뭐고, 누가 이기든 무슨 상관이야?"라는 영만(공형진)의 절규는 그래서 겉돈다.
한 영화평론가는 "물론 세련되게 잘만든 영화이지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없다. 외국인도 이해할 만한 논리도 부족해 일본(6월 개봉)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실미도'에 이어 '태극기…'까지 1,000만명을 돌파한다면 향후 흥행을 염두에 둔 한국영화가 집단적 자아도취에 빠져 '파묻힌 역사 되살리기'에만 집착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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