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일 오후6시 독일 베를린의 대극장인 조 팔라스트 1층 로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마리아'의 여주인공 곽지민(19)이 제54회 베를린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는 순간, 대기중이던 외국 취재진 50여명이 탄성을 질렀다. "오, 마이 갓!(Oh! My God!)" 남색 저고리와 분홍 치마, 댕기 머리를 한 한국의 10대 소녀에 파란 눈의 기자들이 쉴새 없이 질문을 해댔다. "나이가 몇이냐?" "한국의 여고생들은 당신처럼 다 예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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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4시 서울 잠실의 한 대중목욕탕. 이번에는 한 중년의 '때밀이' 아주머니가 곽지민의 등을 수건으로 벅벅 밀어주며 말을 붙였다. "학생! 얼마 전에 TV를 봤는데 우리나라 영화 '사마리아'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대….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 하는데, 참 대단도 하지? 그런데, 그러고 보니 학생이 그 여주인공을 닮았네? 예쁘기도 하지."
올해 서울 진선여고를 졸업한 곽지민은 앳된 10대 소녀다. 예정보다 일주일 앞당겨 3월5일 개봉하는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의 완전한 모습도 아직 국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청소년 성매매(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는 사실과 김 감독의 연출변(辯)과 수상소감, 3분짜리 예고편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배우로는 가장 어린 나이에 베를린의 레드 카펫을 밟은 여주인공에게 쏠린 대중의 관심은 대단하다.
지난해 10월 실제 여고 3년생으로 청소년 성매매를 다룬 영화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또 반라의 수녀복 차림으로 '사마리아'의 홍보포스터를 찍었을 때 학교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모두 기겁했다. 담임 선생님은 "당장 촬영을 그만 두라"고 말했고, 반 아이들은 "굳이 그런 영화에 출연하면서까지 연기자가 되고 싶냐?"고비아냥거렸다. 일부 언론은 포스터를 앞세워 선정적으로만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다.
"공개오디션을 통해 주연 연기자로 선발된 후 시나리오를 읽고는 감독님에게 '못하겠다'고 그랬어요. 노출 장면도 많고 무엇보다 원조교제라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어요. 그러자 감독님이 '노출 장면을 최소화하겠다. 시나리오도 대폭 교체하겠다'고 제안해 마음이 흔들렸죠. 해외에서 인정한 감독의 작품인데다 저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결국 출연키로 결정했어요."
'사마리아'는 유럽여행을 가기위해 청소년 성매매를 하는 여고생 2명의 이야기. 곽지민은 친구 재영(서민정)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이 직접 재영이 상대한 남자들과 섹스를 갖고 돈을 돌려주는 여고생 여진 역을 맡았다. 원조교제에 나선 딸을 목격하고 남자들을 죽이는 형사 아버지(이얼)의 이야기도 나온다. "베드신은 하나도 없어요. 누드도 친구 재영이를 목욕시켜주는 장면에서 뒷모습만 나와요. 야한 영화가 절대 아닌데 포스터가 너무 앞서간 것 같아요."
그러나 촬영은 너무 힘들었다. 김기덕 감독 특유의 '빨리찍기' 때문에 촬영이 불과 15일만에 이뤄진 이유도 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여고생이 모텔을 오가며 촬영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주로 서울 화곡동의 모텔촌에서 찍었는데 모텔이라는 분위기가 너무 낯설고 무서웠어요. 특히 연꽃무늬가 들어간 분홍색 벽지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사마리아'를 찍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도 어린 여고생들이 성매매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휴대폰 요금을 내기 위해, 예쁜 옷을 사기 위해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영화제목 '사마리아'가 죄가 있건 없건 용서해줘야 할 민족을 뜻하듯, "인간이 어떤 이유로든 다른 인간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게 이 영화의 주제인 것 같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베를린영화제 시사회장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사마리아'가 혹시 상을 받으면 이 차를 상으로 주지 않을까?'하고 기대했을 정도로 순수하고 어린 소녀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른 뺨 친다. 연기자가 되고 싶어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고3때 예체능계로 전환했고, 촬영 중에는 극중 여진 역에 너무 몰입해 제작진이 걱정할 정도로 며칠씩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소속사인 씨아이미디어의 문형욱 실장은 "나이는 어리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연기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도 베를린영화제가 끝나니까 예전의 저로 돌아간 것 같아요. 교장 선생님도 축하 전화를 해주셨고, 반 아이들도 '만나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앞으로는 좀더 밝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니콜 키드먼이나 조디 포스터처럼 폭 넓고 다양한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제가 직접 (연기)상을 받아야죠."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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