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배우의 누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누드란 벗는 소수와 벗지 않는 다수가 공존함으로 해서 그 가치가 발생한다. 모두가 함께 벗고 사는 세상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울면서 사죄하는 여배우와 울면서 사죄 받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는 그 누드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의 구조를 생각해 봤다. 소수의 가해자인 여배우와 제작사, 소수의 피해자인 위안부 출신의 할머니들, 각각 그들의 편에 서서 공방을 벌이는 여러 단체들, 그 사건과 공방을 보도하는 다양한 매체들, 그리고 그 매체들을 통해서 그 공방을 보고 있는 익명의 우리들 중 과연 누가 소수고 누가 다수인가?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자세히 보면, 가해자로 낙인 찍힌 소수 속에도 다수에 의한 피해자가 있고, 피해자 편을 드는 다수 속에도 소수의 특권을 노리는 가해자가 있다.
욕망이 들끓는 속세란 이렇듯 난마처럼 뒤얽힌 것이다. 오늘날 한국 연예계에서는 신인이나 한물간 여성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해 부업으로 옷을 벗고 누드를 찍는게 공공연한 사실로 되어 있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인기를 얻고 본업의 무대로 복귀한 후에는 절대로 옷을 벗지 않는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참으로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한국 대중들은 연기와 미모와 인기를 고루 갖춘 정상급 여배우들이 열연하는 아름다운 섹스신을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고, 인터넷엔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삼류 포르노가 넘쳐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히 한마디 하고 싶다. 대중과의 교감을 위해서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는 건, 목욕탕에서 옷을 벗는 것과 연인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을 합한 것만큼 본질적이고 숭고한 행위다.
나는 지금 부산의 한 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끔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절을 한다. 최소한의 의상만 걸친 부처님 모습은 그 자체가 누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천하에 공개하고도 늘 당당한 누드! 누구든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릴 수 있는 누드! 그런 누드를 보고 싶다.
조 철 현 타이거픽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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