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난파선처럼 흔들리고 있다.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총선에서 참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당을 휩쓸고 있다. 당 대표는 거센 퇴진 압력을 받고, 당명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최병렬 대표는 22일 "가까운 시일 안에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를 선출하겠다"고 퇴진 압력을 수용했다. 그는 "친북 반미 성향의 노무현 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국민정당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백의종군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그 동안 상대의 잘못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졸렬한 정치를 해 왔다. 자신의 잘못이 아무리 커도 반성하지 않고 상대의 잘못을 걸고 넘어갔다. 그것이 오늘의 몰락을 가져온 큰 이유였다. 이번에도 최 대표는 짧은 회견문의 상당 부분을 노무현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채웠다.
자신의 잘못보다 상대의 잘못을 더 문제 삼는 태도는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드러났다. 최 대표의 퇴진을 주장한 '개혁파'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 대표는 사실 불분명한 죄목으로 퇴진 압력을 받아왔다. 리더십이 부족하다, 당 대표의 희생 없이 당을 개혁할 수 없다, 불법 자금의 책임을 이회창씨에게 떠넘겼다는 등의 공격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당대회에서 선출한 당 대표를 9개월 만에 갈아치울 이유인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개혁파'는 자신들의 잘못은 잊고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 그들은 지난 9일 밤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안과 이라크 파병 동의안 통과가 예상되던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서청원 석방 결의안을 기습 통과시켰던 그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 그들은 반개혁에 협조했다.
서청원 석방 결의안은 재적 의원 220명중 찬성 158, 반대 60, 기권 2표로 통과됐다. 한나라당 의원 147명중 구속된 7명을 제외한 140명이 일사불란하게 찬성표를 던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결과였다.
그렇게 해 놓고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최병렬 대표의 리더십을 문제 삼는 것은 "우리는 거수기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각자가 '헌법기관'임을 자부해 온 사람들이 비리 혐의로 구속된 동료 의원 석방안에 일사불란하게 찬성표를 던졌으니 한나라당의 행태는 공화당 시절로부터 멀리 왔다고 볼 수 없다.
개혁파들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그들은 그날 밤 건너서는 안될 강을 건넜다. 한 의원은 "나는 기권했다"고 말했다. 기권이 아니라 투표함을 가로막더라도 통과를 막았어야 한다. 석방안 자체가 상정되지 못하도록 몸을 던져서 당의 침몰을 막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당 대표의 책임만 묻고 있다.
최 대표로서는 억울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당 대표가 되려고 했던 작년 6월의 결심에서 잘못이 시작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집권세력이 서투르고 거칠고 위험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노련한 보수가 야당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시대착오적이다.
'서투르고 거칠고 위험한 개혁세력'에 패배하여 정권을 잃은 보수가 과거의 방법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단식투쟁, 방탄국회, 비리의원 석방 결의 등 최 대표와 한나라당이 선택했던 대여 투쟁은 과거의 방식이다. 군사독재 아래 야당들이 생존하기 위해 싸우던 방식을 민주화된 오늘 제1당인 한나라당이 답습한다면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최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오는 총선은 한나라당의 미래뿐 아니라 나라의 미래가 걸린 선거"라고 말했다. 보수를 대변해 줄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정말로 '나라의 미래가 걸린 선거'라고 생각한다면 한나라당은 정신을 차리고 겸허해져야 한다.
대표를 바꾸고 당명을 바꾼다고 당이 살아날 수는 없다. 지금 한나라당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반성이다. 반성할 줄 모르는 정당이 새 출발을 한다면 국민이 믿겠는가.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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