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이라크 추가 파병 동의안' '비위 혐의 의원 석방 결의안'등의 통과 때 보인 정당과 의원들의 행태는 이념 당론 등 정체성을 알 수 없는 혼란의 극치였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한다.냉전 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정치의 산물이기는 하나 우리 정당은 보수 이외의 다른 이념 성향 및 정책 추진 의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오직 선거 승리가 이념이고 정책과 갈등 조정은 이념 대신 집단적 여론에 따라 우왕좌왕한다. 경제와 사회는 끝없이 추락한다.왜 이렇게 되었는가.
첫째, 우리 정당은 40년 간 권위주의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을 통해 존립하면서 반사적 자유주의 성격을 지니게 됐다. 정당의 역사적 비전과 이념적 정체성 그리고 응집력은 매우 약하다. 이 때문에 중력이 강한 권력 배경이나 3김처럼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없으면 정당과 정치인 모두 동요하고 불안정해진다.
둘째,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은 기본적으로 유권자의 이해와 정서의 노예가 되는 반역사성을 지니기 쉽다. J. S. 밀의 의원관처럼 '당선되는 순간 지역구 대변인이 아니고 국가 의사결정의 대표자'라는 인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지역구민 눈치보기에 사로잡힌다.
셋째, 최근 선진국 의회정치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념 성향이 약한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특정 목적을 중심으로 뭉치는 '패거리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넷째, 언론은 정당과 의원의 좋은 정책대안 10개보다 의원들의 몸싸움 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 부정적 비판만이 눈에 띄고 창조적이고 발전적 현상과 태도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따라서 정당 내지 정치인이 정책 또는 이념을 제시하는 정책선거에 힘쓸 리 없다.
그 대신 부정선거에 급급해 부정부패에 대한 죄책감 대신 정치자금 무류(無謬)의식에 사로잡혀 정의감각이 마비된다. 이를 응징하기 위한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는 오히려 정치를 비정치화시켰다. 따라서 지역구도 타파 및 깨끗한 정치 이상을 토대로 한 정치개혁과 정치 활성화가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기 정책 선점주의 수준의 특색 없는 정당을 차라리 명백한 이념 정당 체제로 바꾸고 정책을 명시하되 민주적 의사결정 및 수용 자세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사회든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과 갈등은 존재한다.생산적 정치는 이해집단의 정체를 명백히 하고 그 갈등의 범위를 인식하여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변·설득하며 조정하는 것이다.다행히 그와 같은 싹과 조건이 성숙되고 있다. 차별적 이념 경쟁의 족쇄인 남북 분단은 계속되고 있으나 권위주의와 냉전 체제 붕괴로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념적 다원성이 허용될 수 있다. 그 예가 진보적 이념을 명시한 정당(민주노동당)의 부상과 의회 진출 가능성이다.
나아가 다양한 시민단체가 색채를 뚜렷이 하면서 정치인에 대한 낙선, 당선 운동을 강화하고 있다. 전경련, 대한상의와 기타 우파 시민단체들도 특정 정책 이념을 명시하는 정치인에 대해 지지와 반대 의사를 뚜렷이 나타낸다.
사회를 감시하는 언론도 진실 추구와 역사적 사명을 인식함으로써 선동적 저널리즘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국민들도 이념 정당 출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다.따라서 정치 개혁 방향은 지역구도 타파나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 그리고 부정부패 극복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기득권 포기 없이 구호만으로 개혁되는 것도 아니며 이념 없는 개혁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어차피 정치는 이념을 같이하는 집단의 권력투쟁 과정이지만, 차별적인 이념과 정책 그리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수용하는 정치풍토 조성 없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
정치권은 수준 높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두려워해야 한다.
전 철 환 충남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