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에도 이런 식으로 땅을 빼앗진 않았을 거예요. 국책사업 명목으로 국민재산을 헐값에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20년 동안 꼬박꼬박 제대로 세금을 냈더니 돌아오는 건 이런 푸대접뿐이네요." 봄 기운이 완연해진 18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3년만 지나면 인구 9만명의 신도시로 상전벽해할 농촌 마을이지만 분노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인근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삼킬 듯했다. '부당한 감정평가 토지주 재산 약탈 말라'고 쓰인 노란 현수막 아래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최근 완료 단계에 있는 판교 신도시 토지 수용을 거부하는 중소 토지주들. 이들은 토지공사의 낮은 감정가에 반발, 3월말까지 예정된 토지수용협의를 해주지 않을 작정이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판교신도시 토지수용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주민들의 명(明)과 암(暗)이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다. 수십억∼수백억원의 돈벼락을 맞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보상액이 기대에 못미친 중소 토지주들과 생계 대책이 막막한 세입자들은 '못 나간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등 마을은 사분오열 직전이다.'어디서 이런 땅 사나'걱정 태산
"20년 전 노후 대책으로 사둔 땅이 이제 쓸모도 없게 됐네요." 신도시 개발지구인 삼평동에 150평의 땅을 갖고 있는 김미라(50·여)씨는 지난 연말 나온 토지공사의 감정가를 보곤 가슴이 턱 막혔다.
김씨의 보상가는 4,700만원. 공시지가의 80%에도 못 미치고 90년대초 공시지가보다도 낮은 금액이다. "20년 동안 공시지가 대로 세금은 내고 토지 안에 아무 것도 짓지 말라는 법도 꼬박꼬박 지켰다"는 김씨는 "개발 제한 구역이라 땅값도 묶여 있었는데 차라리 돈 대신 땅으로 보상해달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운중동에 1,000평을 소유한 정모(55·여)씨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평당 35만원 꼴로 3억 2,000만원을 보상받는 정씨는 "공시지가보다는 높게 받았지만 충청도 산골의 묘지 땅도 50만원이 넘는다"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어디 가서 이런 땅을 이 돈으로 살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현재 성남시, 토지공사, 주택공사 등 신도시 시행기관이 집행한 토지 보상금은 1조 9,655억원. 전체 수용금액의 79.7%, 면적으로는 70%에 이르지만 이들 중·소 토지주들의 반발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들은 협의수용 거부는 물론 행정소송까지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500여명은 최근 판교개발지역토지보상대책위원회(대책위)를 꾸려 토지감정가 재심요청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최근 판교지역을 투기지구로 묶겠다는 정부의 엄포가 이어져 이들의 화를 더욱 돋우고 있다. 투기지구로 지정되면 이들은 토지를 수용할 때 공시지가가 아닌 보상가격을 기준으로 양도세를 내야하기 때문.
대책위의 나철재(62) 위원장은 "정부의 계속된 투기억제책으로 땅값이 오히려 떨어져 90년대 초에 비해 땅값이 10분의 1수준으로 낮아진 곳도 있다. 정부가 또 투기지역으로 지정해 세금까지 높게 매긴다면 누가 정부에 땅을 팔겠느냐"며 강경 대응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세입자·무허가 집주인 '우린 어쩌나'
그러나 세입자들에게 토지주들의 항변은 사치스럽기만 하다. 1,500여 가구로 추산되는 세입자들은 확성기를 틀고 다니며 생계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토공이 제시하는 세입자 대책은 주거 이전비(4인 가족 기준 770만원) 또는 2007년께나 들어설 임대아파트 입주권. 그러나 이들의 가장 시급한 요구는 가(假)이주단지 건설이다. 올 연말 철거가 시작되면 이들 대부분은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보증금 100만원, 월 15만원 월셋방에 산다는 홍인호(47)씨는 "성남만 해도 보증금 1,000만원에 20만원짜리 방도 구하기 힘들다"며 "번듯한 집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신도시 건설을 위해 철거될 학교나 아니면 컨테이너라도 만들어줘야 비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 아니냐"며 항변했다. 개, 토끼 등을 키우는 축산농가들, 무허가 영세 공장주들, 무허가 주택 거주민들은 그나마 변변한 이주 대책도 마련돼 있지 않다.
'수십억 보상' 행복한 고민들
반면 돈벼락을 맞은 대토지주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전답 4,000평을 수용당해 60억원(평당 130만원대)의 보상을 받았다는 토박이 농민 이모(70·농업)씨가 대표적인 케이스. 20여평짜리 노후주택에 대한 보상비까지 챙긴 그는 인근 분당신도시의 중대형 아파트를 한 채 구입해 곧 이사갈 예정이다. 그는 농사 일을 그만둘 수는 없어 경기 광주에 2,000평의 땅도 사두었다.
토지보상이 시작된 이후 10억원 이상의 보상비를 받은 토지주는 줄잡아 수백명에 이른다. 분당신도시의 금융기관들은 이들의 돈을 유치하기 위해 안달이 나있고 인근 고급술집에서도 이들을 붙잡는데 발벗고 나섰다.
돈벼락을 맞은 대토지주들은 광주, 성남은 물론 멀리 강원 횡성까지 대체 투자처를 찾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다. 판교 인근 중개소 거리 K 중개사 사무소 관계자는 "용인, 이천, 백암의 중개사들이 이쪽의 대토지주들과 연결시켜달라고 성화가 보통이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주민들의 표정에는 명과 암이 교차하지만 시행기관들은 한결같이 판교의 토지 수용 과정이 어느 때보다 공정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전과는 달리 주민이 추천한 감정사까지 포함, 3개 기관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토지공사 관계자는 "국가 사업을 행하는 데 일부 원주민 토지주들이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인정한다"며 "끊임없이 요구를 들어다주면 분양가가 높아져 정작 서민들을 위한 신도시 조성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판교=이왕구기자 fab4@hk.co.kr
●"판교 투기지역 지정땐 稅불리" 보상 조기 수용 압박
판교신도시 사업 시행사인 성남시와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 등이 토지 투기지역 지정 임박을 빌미로 주민들에게 보상 압력을 행사해 지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또 지구 안에 최근 지어진 수 십억원대 이상의 신축 건축물들도 모두 철거 대상에 포함돼 국가적 낭비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2일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최근 판교 일대가 토지 투기지역 지정이 유력해지자 '보상을 받지 않을 경우 세금 강화 등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지주들에게 발송했다. 이에 대해 아직 협의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주민들은 "시행자가 투기지역 지정에 따른 양도세 강화를 빌미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보상 대상 주민들은 "투기지역 지정이 되면 양도세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점을 부각시켜 시행자가 지주들을 상대로 저가 보상을 종용하고 있다"며 "말로만 협의 보상이지 일방적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주민들은 또 "이미 감정평가를 통해 보상액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투기지역 지정을 기준으로 세금 기준을 달리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주택공사 관계자는 "투기지역 지정에 따른 중과세 부과 등 불이익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일 뿐 보상 압력을 가한 것은 아니다"라며 "협의 보상이 이뤄지지 못할 경우 자칫 강제 수용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돼 지주들을 위해 안내문을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또 100억원 이상을 들여 지은 지 4년밖에 안된 대형 교회와 20억원을 들여 건축한 대형 종합물류센터, 이주자 택지 내 고급주택 등도 모두 철거대상에 포함시켜 해당 건물주들과의 마찰도 끊이지 않고 있다.
건물주들은 "원칙 없는 철거 기준 때문에 신축 건물조차 철거될 위기를 맞았다"며 "이는 개인 재산권 침해일 뿐 아니라 국가적 낭비"라고 주장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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