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에 시달린 겨울이었는데 갑작스럽게 기온이 뛰어올랐다. 곧 봄이다. 시인들이 먼저 봄 소식을 전해왔다. 두 시인의 시집에서 봄은 젊은 날의 생기가 되살아나 가슴 가득 차오르는 때이고, 사미승(예비 승려)의 가슴을 쿵쿵 뛰게 하는 날들이다.●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원재길 지음 민음사 발행·6,000원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 온 땅의 반란, 장난기 가득한 초목들의 곁눈질, 꽃 피어나는 것들, 햇살에 꿈 그을리는 것들, 생명스러운 사물들, 죽은 체하는 익살꾼들, 나는 웃는다, 어깨를 한껏 펴 본다,'('겨울에서 봄으로―젊은 날의 여로')
한자 시(詩)는 말[言]과 절[寺]이 만나 만들어진 것이다. 말의 조화에 따르면 시는 '속됨과 성스러움이 한데 있으며, 인간과 신들이 어울려 노는 자리'다. 그 시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던 원재길(45)씨가 15년 만에 두번째 시집 '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을 출간했다.
그는 시인으로 출발했지만 곧 소설을 썼고 다섯 권의 장편과 두 권의 소설집을 냈다. 그리고는 4년 전 번잡스런 도시생활이 싫어져서 강원 원주의 산골마을로 떠났다. 작가는 말한다."시는 적막과 고독의 형제이자, 상상력의 아들이고, 직관력의 막내딸이며, 모든 노래의 이웃사촌이다."
산 속에서 적막의 소리를 배우면서 오래 손 놓았던 시가 살아났다. 나무와 눈과 비와 흙이 친구가 되고 시가 됐다. 시작(詩作)은 세련되지 않지만 진솔하고 선하다. '느닷없는 물방울의 소란/ 창 유리 더듬는 바람'('여우비'에서), '방으로 쳐들어오는/ 어린 날 개구리 울음소리'('환청'에서). 자연으로부터 시를 얻었고 삶의 열정을 얻었다. 원씨에게 시를 새로 쓰는 것은 삶을 새로 쓰는 것이다. '곰팡내 나는 삶/ 뿌리째 캐서 볕 아래/ 옮겨 심고 싶다'('블로크 시 <아, 나는 미친 듯이 살고 싶다> 에 바침'에서). 아,>
이렇게 쓰여진 장시 '겨울에서 봄으로'는 놀라운 성취다. 젊은 날을, 봄을 지척에 둔 숲을 걷는 산책길로 형상화한 이 시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목련에서 등나무꽃 사이. 넝쿨에서 넝쿨 사이, 쓰레기 더미에서 피는 꽃들. 펄럭거리는 종이쪽들, 일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법의 날벌레들'은 '상처와 망상이 다한 자리'에서 '순정, 부드러움, 넓고도 훤히 트인 마음의 입지'를 마련해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을 갖고 그는 3월 세번째 소설집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 환장할 봄날에 박규리 지음 창비 발행·6,000원
'이 환. 장. 할. 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천리향 사태'에서)
박규리(44)씨가 전북 고창의 미소사에서 공양주로 절 살림을 맡아온 지 8년째다. 그는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민족예술'에 시를 발표한 직후 절을 찾았고, 그곳에서 시를 썼다. 그곳에서 오래 써온 시 50 여편을 모아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를 펴냈다.
공양주는 절 안에 속해있지도, 절 밖에 속해있지도 않다. 이 경계에 선 시인의 존재가 곳곳에 배어 있다. 돈 버는 일에 지치고 세상살이도 힘겨워서 산으로 들어왔는데, 자꾸만 목이 칼칼하고 철없이 사람이 그리워진다. 봄 한낮에 몸은 치자향 흐드러진 산에 있는데, 마음은 내려다 보이는 마을로 간다. '이장집 스피커로 들려오는/ 홍탁에 술 넘어가는 소리,/ 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지만/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아래 있어서/ 마음은 아래로만 흐른다'('봄, 한낮'에서)
절에서 하루하루 나는 일상의 삶 중 오동나무 키우는 늙은 변소간도, 변소간이 방귀를 뀐다며 헐뜯는 구미호같은 보살도('그 변소간의 비밀'), 고양이새끼를 제집에 들여놓은 개도('성자의 집')시가 되었다. 절을 찾게 된 데 대해 몸과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는 그는 말을 아끼는 대신 시로 상처의 독기를 뿜고 스스로 다독인다.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새벽별'에서)
겨우내 마음을 다스렸더니 이 환장할 봄날에 마음이 나른하게 흩어진다.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이젠 오도가도 못해서 홀로 돌고 돌다가…'('천리향 사태'에서) 절에 들어야 할지, 저자로 나와야 할 지 시인의 마음은 여전히 돌고 돌면서 고민 중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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