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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로 철학하기

입력
2004.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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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리치 지음·이종인 옮김 시공사 발행·1만3,000원

영화 '토털 리콜'에는 화성 여행 메모리를 임플란트 시술받기 위해 리콜이라는 회사를 방문하는 더글러스 퀘이드(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등장한다. 하지만 가상 체험을 위한 시술 중 문제가 생기고 만다. 그 결과 퀘이드는 그의 일생을 구성하는 기억의 총집합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밀요원이었다가 정부를 배신한 그의 뇌 속에 정부의 앞잡이가 넣은 메모리 칩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인생은 혹시 한 순간의 꿈이 아닐까? 우리가 오감을 통해 실재한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설혹, 실재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토털 리콜'의 문제의식을 훨씬 세련된 영상 기술로 펼쳐보이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도 이 같은 주제는 반복된다. 물론 더 흥미를 끄는 것은 액션이겠지만 두 영화는 '회의주의'라는 서양철학의 중요한 주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매우 철학적인 영화들이다.

이 책은 미국 앨라배마대 철학과 교수가 수년간 이런 영화를 소재로 삼아 대학 초년생에게 강의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게 원래 취지가 아니어서 좀 딱딱한 구석도 없진 않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보고 나온 뒤 뭔가 좀 심각하게 토론해 봤을만한 영화들에서 어떤 철학적인 주제를 끌어낼 수 있는지 아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책에는 모두 12편의 영화가 등장한다. '회의주의'의 교재는 '토털 리콜'과 '매트릭스'이고 '상대주의'에는 '힐러리와 재키'(아난드 터커 감독·1998년)가 소재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메멘토'를 가지고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제7의 봉인'(잉마르 베리만·1957년)과 '휴거'(마이클 톨킨·1991년)를 가지고 악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는 실존주의를 따져본다.

저자는 '토털 리콜' '매트릭스'의 장면들이 실재와 무관하게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옹호하는지를 보여주면서 흄으로 대표되는 철학사의 회의주의론자들의 견해와 연관짓는다. 또 데카르트를 위시해 버클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칸트가 회의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왔는가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봤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정신 없었다고 하는 '메멘토'에서는 심리적 연속성을 포함한 정체성 이론을 검토한다. 심리적 연속성 이론은 1년 전을 기억하고 있다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한 인물이라는 입장. 기억의 훼손이 없는 정상인에게는 별 문제 없이 이해될 테지만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전날의 기억을 깡그리 망실한다. 심리적인 특징이나 의식의 연속성이 없다. 심리적 연속성 이론에 따르면 레너드는 여러 명이다.

이 책은 영화분석서가 아니라 철학서이다. 책의 순서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자가 만일 영화의 의미있는 주제들을 곰씹어 보자는 취지로 책을 썼다면 목차는 거꾸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서양철학의 기본 개념인 회의주의, 상대주의 등을 이야기하는 초반부가 재미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몇 고비만 넘기면 흥미롭고 무척 유익한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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