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은 나의 전성시대였다. 방송 출연과 기고 등 눈코 뜰 새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알로에 강연을 다녔다. 83년 10월 재기하면서 시작한 강연은 처음엔 청중을 손으로 셀 정도였다. 그러다 잘 나갈 때는 2,000명을 넘었고 일주일에 두세 번 강연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그러던 어느날 서울 강연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86년 6월 무렵이다. 그녀는 나보다 36세나 어렸다. 나는 환갑을 바라보는 쉰 아홉이었고 그녀는 스물 셋 꽃다운 나이였다. 그녀는 종로 5가의 한 오퍼상에서 근무했는데 마침 사무실 인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했다. 중증변비와 사흘이 멀다 하고 급체를 일으키는 위장병으로 심하게 고생한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강연에 매료된 뒤 열성적인 알로에 팬으로 변했다. 우린 자연스레 자주 만나면서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지나 수유리 뒷골목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녀의 이름은 유인자였다.
엄연한 처녀였던 그녀가 왜 나를 택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는 당시 호적상 독신이었다. 결혼은 했지만 병 치레를 하면서 아내가 가출한 상태였다. 나의 가능성과 온유하고 따뜻한 성격에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결혼이었으니 뒷말이 무성했다. 온갖 악의적인 해석이 난무했다.
그녀가 돈을 보고 나를 택했다는 소문이 단골 메뉴였다. 우리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나는 당시 명사 축에 낄 만큼 성공했지만 현금은 별로 없었다. 집과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데다 이윤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다. 나머지도 직원복지 향상과 재투자에 쏟아 부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런 이유로 500만원 전세인 신혼방도 절반은 그녀가 마련했다.
우리는 주위 시선은 무시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93년 4월에는 아들 남늘이를 낳았다. 그녀는 아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95년 6월 29일은 하늘이 무너진 날이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사고로 500여명이 유명을 달리 했다. 남늘이 모자도 포함돼 있었다.
남늘이 엄마는 그날 오후 3시 은행에 들렀다 삼풍백화점에서 찬거리를 사오겠다고 했다. 나는 당시 전세로 살던 삼풍아파트에서 원고를 정리하며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5시 55분께 '꽝'하는 굉음이 울렸고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순식간에 맥이 풀리면서 남늘이 얼굴이 스쳐갔다. 나는 남늘이의 극성에 아내가 서둘러 쇼핑을 마치고 근처 놀이터에서 놀기를 바랬다. 미친 듯 주변을 찾아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그들 모자는 사고 후 스무 날이 지나 작은 구멍에서 발견됐다. 별다른 상처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119 구조대원의 말로는 아내가 위에서 남늘이를 꼭 안고 있었다고 했다.
기다림의 세월은 악몽이었다.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구출되기만을 기원했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나라로 가 버렸으니 내 심정은 단장(斷腸)의 아픔 그 자체였다. 지금 그들은 천안 공동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엄마는 서른 둘, 아들은 겨우 두 살 배기 였다. 이 같은 참극이 한 사업가의 끝없는 욕심과 관료들의 결탁으로 이뤄진 인재(人災)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장례를 치른 뒤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묻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미국을 거쳐 남미의 에콰도르로 외국 지사 개척을 위해 떠났다. 기업을 위해 마음의 피멍을 안은 채 장거리 여행에 나선 것이다. 일면 다정다감 하지만 냉혹하리만치 자기 의무에 집착하는 성격 탓도 있었다. 나는 이 아픔을 딛고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내겐 전국의 조직원과 소외 받는 계층을 위해 해야 할 의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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