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국민의 23%가 한 영화를 봤다는 것은 세계영화사상 유례없는 일이다."(차승재 싸이더스 대표)"800만명은 넘을 줄 알았지만 1,000만명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배우 정재영)
"한국영화가 국내흥행에 힘입어 해외시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이춘연 씨네2000 대표)
꿈의 숫자로만 여겨졌던 '영화 1편당 1,000만명 관객' 시대가 영화 '실미도'(제작·투자·배급 시네마서비스)에 의해 열렸다. 2001년 '친구'(818만명)의 흥행 성공으로 '혹시나' 했던 1,000만명 관객 시대가 2년도 안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요즘 충무로는 '실미도'의 흥행성공으로 한국영화 시장이 다른 차원에 진입했다는 설렘과, 대작(大作) 영화에 대한 투자가 한결 쉬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다.
'실미도'의 1,000만명 관객 동원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가능했다.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실미도' 역시 684부대라는 역사적 실체에 접근,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영화 완성도를 떠나 흥행에 성공했다.
차승재 대표는 "출판이나 음반 등 다른 어떤 문화상품도 단일 품목으로 '실미도'처럼 많이 팔린 적이 없었다"며 "이는 실미도부대 실체에 대한 사회적 논란과 함께, 영화 감상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광모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도 "월드컵이나 이승연 누드 사진 파동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는 우리국민의 정서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충무로에서는 당분간 대작영화 제작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성냥팔이 소녀의재림' '튜브' '청풍명월' 등 '친구'의 성공 이후 제작된 거대 예산 영화들이 줄줄이 '재앙'을 맞으면서 투자자까지 떠났던 충무로에 대작영화 흥행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부풀어 오르고 있다. 올해 한해만 해도 제작비 100억원 규모의 '기운생동'을 비롯해 '역도산'(70억원), '태풍'(90억원), '바람의 파이터'(60억원) 등 대작영화가 제작된다.
한편 '실미도'의 경제파급 효과를 3,000억∼4,000억원으로 분석한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 '실미도'의 성공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선호가 증가해 영화산업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태극기 휘날리며'가 엄청난 기세로 '실미도'의 기록을 좇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관객의 파이는 정해져 있어 한 영화가 크게 터지면 다른 영화는 상대적으로 죽는다는 주장은 이제 옛 말이 됐다.
그러나 '실미도'의 흥행성공이 장밋빛만 남긴 것은 아니다. 제작비 100억원을 들인 대작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관객은 약 330만명. 지난해 개봉영화 65편 중 그것을 넘긴 영화는 '살인의 추억' '동갑내기 과외하기' '스캔들' '올드 보이' '장화, 홍련' 5편밖에 없었다. 강우석 감독도 "모두가 대작영화에만 매달린다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없다"며 "20억∼ 30억원 안팎의 소품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져야 한국영화의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작 영화의 스크린 독점으로 '작은 영화'들이 설 자리를 잃은 것도 큰 손실이다. 실제로 19일 현재 '실미도'는 전국 220개, '태극기 휘날리며'는 513개 스크린에서 상영돼 전체 1,271개 스크린의 6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다. 더욱이 작은 영화들과 대작들의 경쟁은 마케팅 비용의 차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실미도' 성공의 환호속에서 일부 영화인들이 예술영화 쿼터제나 멀티플렉스의 중복·교차 상영 금지의 제도화 등 배급시장 불균형 개선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네 박자" 척척… 한국영화 원동력
한국영화 한편에 1,000만 관객시대를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많은 영화인들은 영화의 질적 도약과 이에 대한 관객의 든든한 신뢰를 꼽는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수준이 높아졌고 관객의 신뢰가 축적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바탕에는 1990년대부터 진통과 갈등을 거듭하며 이뤄진 성공적인 영화인력의 세대교체가 있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새로운 기획·제작자군의 대거등장이 지금의 한국영화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일본 영화감독 이와이 순지까지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것에 실패해 아직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한국 영화계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부러워했다. 차승재(싸이더스 대표), 심재명, 오정완(봄 대표)등 40대 제작자들과 강제규 박찬욱 곽경택 봉준호 이재용 등 젊은 감독들은 장르의 벽을 과감히 무너뜨리면서 관객의 다양한 기호를 파고들었다. 코미디와 멜로 밖에 없던 한국영화에 '살인의 추억' 같은 스릴러가 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창동 김기덕 같은 감독은 자신의 독특한 색깔로 베니스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따냈다. 여기에는 1,5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도 한 몫을 했다.
관객 폭발을 불러온 또 하나의 토대는 1,300개관에 육박하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의 증가와 유통배급시장의 빠른 변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 1, 2주 안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식 '히트 앤드 런' 전략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메이저 중심으로 재편된 막강한 배급력과 중소도시까지 파고든 멀티플렉스 덕분이다.
과감한 소재 선택과 보다 탄탄해진 이야기 구조, 세련된 촬영기법, 디지털의 다양한 응용 또한 한국영화 성공의 빠질 수 없는 요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금기와 야사에 갇혀 있던 이야기의 광맥을 캐내며 잇따른 대형 블록버스터의 실패를 딛고 일어섰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공동경비구역 JSA'나 국가폭력의 비밀을 밝힌 '실미도'는 불과 5, 6년전만 해도 감히 영화로 만들 생각을 못했던 소재. '말할 수 없던 것을 영화로 풀어내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는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진단은 한국 영화 성공의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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