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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35>고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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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35>고칼레

입력
2004.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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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2월19일 인도의 사회운동가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가 49세로 작고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기까지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은 라트나기리 출신의 두 동향인이었다. 한 사람은 발 간가다르 틸라크고, 또 다른 사람은 열 살 연하의 고칼레다. 틸라크와 고칼레는 인도 국민회의파 내부에서 그 시기 독립 운동의 두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민족운동의 중심에 노동운동을 배치하며 국민회의 급진파를 이끌었던 틸라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테러리즘을 포함한 폭력에 호소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고, 온건파 지도자였던 고칼레는 사안에 따라 식민지 정부에 협력하며 교육과 경제 개선을 통해 독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칼레의 합법 노선과 틸라크의 급진 노선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느 쪽이 옳았느냐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 두 노선은 정세와 국면에 따라 서로 다른 효과를 내며 영국의 식민주의를 패퇴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비폭력주의자였으면서도 급진주의의 미덕을 알았던 간디가 둘 가운데 더 높이 평가한 것은 고칼레의 길이었다. 두 사람을 모두 존경했던 간디가 이들의 사후에 선배들에 대해 내린 평가는 이렇다.

"나는 틸라크의 후계자가 되는 영광을 주장할 수 없다. 인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 틸라크에 앞설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스와라지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나는 그의 메시지를 그의 제자 누구 못지않게 성심껏 인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방법이 틸라크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틸라크가 대양이라면 고칼레는 갠지스강이다. 바다에는 아무나 쉽게 뛰어들 수 없지만, 성스러운 강에서는 누구나 목욕을 할 수 있다. 갠지스는 나를 품안에 껴안는다. 고칼레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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