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20대는 화려했다. '대장금'의 이영애 못지않게 맑았고, '천국의 계단' 최지우처럼 청순했고, '발리에서 생긴 일' 하지원보다 농염했다. 이제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젊음은 갔지만, 곰삭은 연기로 브라운관을 꽉 채우는 그들은 여전히 아름답다.미인도 방귀를 뀐다
MBC '천생연분'은 '황신혜 드라마'다. 연상녀―연하남 커플에 맞바람이란 파격적인 소재도, 귀여운 푼수를 능청스레 소화한 황신혜(41)가 없었다면 빛이 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이나 해봤는가. 여전히 도도함이 느껴지는 '절대 미인'이 남편과의 잠자리에서 방귀를 뿡뿡 뀌어대고, 이에 김이 끼었는데도 바보처럼 웃고, 남동생 사각팬티 뺏어 입고 활보하는 모습을. 그는 "제가 원래 이래요"라고 고백하지만, 미인 판타지를 깨끼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황신혜의 이력을 찬찬히 돌아보면 이번 변신이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스물 일곱에 졸부 유혹하는 카페 여주인('열방각하'·1990)에 도전했고, '애인'(1996) '사랑의 전설'(2000) '위기의 남자'(2002) 등에서는 유부녀의 흔들리는 사랑을 연기했다. '천생연분'에서는 한 발 더 나가, 비록 코믹의 옷을 입긴 했지만 억척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대한민국 아줌마'의 현실을 비틀어 보여줬다. 그렇게 한 뼘 한 뼘 길을 넓혀온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부드러워서 더 강하다
2003년, 연기자 양미경(43)은 새로 태어났다. 조연, 그것도 도중에 죽음을 맞은 역으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MBC '대장금'이 낳은 '한상궁 신드롬'은 그에게 "데뷔 20년만의 최고 인기"를 선사했다. 부드럽지만 강하고 인자하지만 강한 참 스승, 그리고 음식 하나에도 혼을 불어넣는 진정한 장인. 그는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 온화한 웃음과 애절한 눈빛을 녹여내며 "새로운 여성 리더십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찬사까지 들었다.
2004년, 연기자 양미경은 기로에 서있다. 청춘남녀의 지지고 볶는 사랑이야기 일색인 드라마 현실에서 한상궁 같은 역할을 또 만나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너무 강하게 박힌 한상궁 이미지가 다양한 배역을 맡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흔을 넘겨 연기인생의 새 장을 연 그가 위기이자 기회인 이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망가져서 아름다운 그녀들
'대장금'의 감초 덕구처의 언행에서 청순가련했던 금보라(41)의 옛 모습은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는 없다. 딸 같은 장금에게도 기필코 대가를 받아내고, 한마디 보태는 일에도 "돈을 내슈" 하며 손 내밀고, '밤일'에 약한 남편을 대놓고 타박하기 일쑤다. 하지만 임현식과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대장금' 보는 재미를 더하는 그를 누가 미워할 수 있을까.
이응경(38)은 어떤가. 찰랑찰랑한 생머리를 기억하는 팬이라면, MBC '회전목마'에서 빠글빠글한 퍼머 머리에 떡칠 화장한 천박한 명자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질지 모른다. 이응경은 철저히 망가짐으로써 밋밋한 인물들만 득실한 '회전목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캐릭터 명자를 빚어냈다. 박수를 받을 만하다. 1980년대를 풍미한 섹시스타 이보희(45)가 KBS2 '달려라 울엄마'에서 공주병 아줌마로 변신한 것도 눈길을 끈다.
왕년의 스타들이 한없이 망가져서 뜨는 모습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때로는 구차한 변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판타스틱 러브'의 주인공을 꿈꾼다면 얼마나 더 구차할까. 어설픈 욕심이 아니라, 철저히 망가져서 배역을 빛낸 그녀들은 결코 밉지 않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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