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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빙상 김윤만 3관왕… "얼음판 총알"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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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빙상 김윤만 3관왕… "얼음판 총알"로 우뚝

입력
2004.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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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20일90년의 배기태 이후 5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3년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유일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김윤만(22·고려대)은 미국 밀워키에서 벌어진 대회 마지막 날 남자 500m와 1,000m에서 각각 36초42, 1분13초11로 1위를 해 전날의 1,000m 우승을 포함, 3관왕이 되면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단거리 종목 500m와 1,000m를 이틀간 두 차례씩 뛰어 종합점수로 최강자를 가리는 방식. 김은 4차례 경주중 3개를 우승해 90년 배기태가 한 종목의 우승도 없이 고른 성적으로 종합점수 1위에 올랐던 것과 비교해 더 값진 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88년 의정부고 1년때 대표로 발탁된 그는 92알베르빌 동계올림픽 1,000m에서는 세계 정상급인 댄 젠센(미국)과 미야베(일본)를 제치고 우승자 진케(독일)에 불과 0.01초 뒤지는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해 한국 빙상(쇼트트랙 포함) 사상 처음이자 스피드 스케이팅 유일의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이전 최고성적은 배기태의 88년 캘거리올림픽 500m 5위.

김윤만은 94릴레함메르올림픽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과 인연이 없던 잰센과의 각축이 기대됐으나 18위에 그쳤다. 잰센은 1분12초43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올림픽 4회 출전 끝에 첫 메달을 목에 걸며 10년간의 불운을 털었다.

김윤만은 98년 나가노 올림픽까지 출전했으나 500m 8위, 1,000m 20위의 불만족한 성적을 낸 뒤 17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1988년 2월 18일

86아시안게임 신데렐라 임춘애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오사카의 요미우리 치토세 실내육상대회 3,000m에서 우승을 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성적이었다.

이화여대 1년생인 임춘애는 9월 서울올림픽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돼 2년전 세 종목(여자 800m 1,500m 3,000m)을 휩쓸었던 그 트랙을 세계의 50억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주하는 영광을 안았으나 경기에서는 3,000m에 출전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과장보도가 나올 만큼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이룬 3관왕이라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임춘애. 때문에 주위에서는 "아시안게임 격려금(1억5,800만원)으로 가난을 벗어 나면서 정신력이 해이해졌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대학에서는 중·고때와 달리 학업을 포기하고 운동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데다 고관절 피로골절 증세까지 악화해 연습이 많이 부족했다. 86때 162㎝ 43㎏ 이었던 몸이 168.6㎝ 52㎏으로 급성장한 것도 부진의 큰 원인이 되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임춘애는 91년 트랙을 떠나 93년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이상용씨와 결혼했으며 생활설계사로 활동했다.

1995년 2월 21일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센터 김병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장신선수들에게 '마판씨 증후군' 주의령이 내려졌다.

성균관대 졸업을 앞두고 현대자동차써비스에 스카우트 돼 겨울시리즈 슈퍼리그에 출전 중이던 200㎝의 김병선은 가슴 통증으로 검진을 받으려 숙소를 나서려다가 쓰러진 후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신으로는 갖기 힘들 정도의 유연성을 지녀 블로킹과 속공, 수비에 모두 능했던 유망주. 대학 1학년 때 대표로 선발돼 92바르셀로나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에 출전하고 기량이 완전히 무르익던 중이라 그의 죽음은 개인적인 불행을 넘어 한국배구계에게도 큰 손실이었다.

사인은 배구나 농구 등의 장신 선수들에게 잘 일어나는 '마판씨 증후군'으로, 심장의 대동맥이 파열돼 급사하는 병. 86년 일본 실업배구에서 활약하다 쓰러져 숨진 미국 여자 대표출신 흑인선수 플로 하이만(193㎝)과 90년 미 프로농구 드래프트 랭킹 1위로 꼽히던 대학농구의 유망주 행크 게더스(203㎝)의 사인도 이것이었다. 90년에는 70∼80년대의 배구스타 강두태(197㎝)가 이와 비슷한 증세로 숨졌다.

김병선 사망 후 배구계에서는 한동안 스포츠 과로사에 대한 대책 수립과 철저한 정밀검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前 투포환선수 백옥자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던 시절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바치겠다'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는데 실제 계령이가 농구 국가대표가 되니 너무 뿌듯해요. 요즘 성당에 나가면 무엇보다 계령이가 올림픽 때까지 다치지 않고 잘 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70년 방콕,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투포환을 연속 제패하고 테헤란에서는 투원반 동메달까지 획득해 '아시아의 마녀'라는 애칭을 얻었던 백옥자(54)씨.

딸에게 태극마크를 대물림 한 그는 "그 때는 생활이 힘들어서 둘만 낳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다섯 명쯤 낳아 국가에 더 기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웃는다.

한창때는 175㎝의 키에 체중을 87㎏ 까지 불려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덩치였지만 지금은 꾸준한 운동으로 75㎏을 유지, 식구들과 함께 서면 아담해 보이는 체구가 됐다.

미국 명문 골프장에서 티칭프로를 하는 아들 호연(28)씨가 193㎝, 여자농구 대표팀 주전센터인 딸 계령(25·삼성생명)이 190㎝, 건국대 입학동기로 농구선수 출신인 남편 김진도(부천대 생활스포츠과 교수)씨가 186㎝. 4명의 평균신장이 186㎝에 이르는 자이언트 가족이다.

70년 방콕에서 아시안게임 사상 한국육상의 첫 금메달, 한국 여자선수의 첫 금메달을 획득했던 그는 68년 인천 박문여고 2년때 대표로 발탁돼 최연소로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한 기록도 갖고 있다. 그가 74년 세운 투포환 한국기록(16m96)은 22년이 지나 96년에야 깨졌다.

75년 결혼 후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도 국제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땄던 그는 78년 은퇴해 인천체고 교사를 하다가 36세로 86아시안게임에서 포환을 던지고, 그 후에는 볼링으로 실업팀 선수생활을 했을 정도로 욕심이 많았다. 골프도 핸디캡 4의 실력. 조금 일찍 시작했으면 박세리를 능가했을 것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은 천부적인 소질도 있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 덕분이다.

최근에는 20년 넘게 살던 잠실의 주택을 헐어 4층짜리 원룸주택을 직접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 '백옥빌라트'로 명명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딸의 매니저라고 말한다 "친정식구들이 살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갔다가 계령이를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때 데리고 왔는데 주위의 권유로 농구를 시키게 되었어요. 그 때만 해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몸매가 좋아 미국에서 모델을 시키려다가 방향을 바꾼 거지요." 김계령은 숭의여고 3년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후 삼성생명에 입단했으며 지난 달 중국을 꺾고 올림픽 티켓을 따 아테네에 가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극성스럽다고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내가 너무 힘들게 운동을 해서 그런지 딸한테는 무조건 잘 해주고 싶어요. 보약을 만들어 체력을 유지시키는 게 최우선이고, 태릉선수촌 생활 15년의 경험을 살려 아무리 훈련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선후배와 단체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도 큰 일이죠."

그는 또 "스포츠계든 연예계든 스타들은 정상에서 물러난 후 공허함을 메울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해요. 나도 계령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렸을 지 몰라요"라며 계령이에게는 은퇴 후 아빠를 이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도록 틈이 나는대로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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