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정오 무렵 청계6가 계원빌딩 앞. 문화재 발굴 조사가 한창인 청계천 지하로 내려가자 코를 찌르는 하수냄새 속에 주홍빛 전등불을 받은 채 널려있는 돌더미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네모 반듯한 받침돌부터 잘게 쪼개진 할석(割石)까지 청계천 복개교량 사이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는 이 돌들은 임꺽정이 가족들을 구한 뒤 이곳의 쇠창살을 부수고 도성을 탈출했다는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의 흔적들이다.상당부분 원형 그대로
오간수문은 청계6가 사거리 동쪽, 동대문(흥인지문)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청계천을 가로질러 난 수문. 무지개형 돌아치가 만드는 커다란 물구멍 다섯 개로 이뤄져 오간수문이라 불렸고, 서울을 둘러싼 네 산(북악·인왕·목멱·매봉)에서 흘러내려 청계천으로 모인 물길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배수구였다.
언제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 개국초 도성을 쌓으면서 물길을 고려해 성벽 아래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대가 도성내 가장 낮은 지대여서 홍수때마다 청계천이 범람해 임금들이 골치를 앓았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의적' 임꺽정의 이야기까지 역사의 더께로 내려앉은 이 수문은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헐려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된 후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50∼150㎝의 두께의 흙을 걷어내자 드러난 수문터에는 하천을 가로질러 연결(총길이 30.66m)하는 수문을 받쳤던 2개의 받침돌과 5개의 물구멍을 형성한 돌 아치의 기초석, 돌아치들을 받치고 있는 4개의 받침돌 등이 놀라울 정도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위해 돌아치의 받침돌을 뱃머리 모양으로 만들었고,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물구멍 앞엔 작은 돌들도 깔아 놓았다. 또 다리받침대의 양쪽에는 물이 들고나기 쉽도록 날개모양의 벽을 설치한 뒤 하부에 지반침하를 막기 위해 지름 10㎝ 안팎의 나무기둥들을 빼곡하게 박아 놓았다. 당시 치수관리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당대 생활상도 생생히
동대문 남쪽에 접해 도성을 방어하는 성벽의 역할도 했던 수문터에선 녹슨 쇠사슬이 연결된 쇠창살도 발굴됐다. 이와 함께 수문을 통해 불법 통행하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미닫이 방식의 쇠창살을 설치하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지름 10㎝의 돌개구멍도 다리받침대 벽면에 남아있어, '개구멍'으로 몰래 도성을 드나들던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다리 받침대 주변에서는 돌거북, 꽃신 한 짝, 숟가락, 젓가락, 참빗, 토기조각 등 각종 생활 유물들도 섞여 나왔는데, 이 중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골호(사리함) 뚜껑도 포함돼 있어 작은 탄성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중앙문화재연구원 윤세영 원장은 "조선말부터 멀리 신라시대까지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돼 청계천의 문화재적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며 "복개구조물 철거공사를 계속할지는 27일로 예정된 광통교 실측 조사와 4월까지 계속되는 시굴 작업의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의 황평우 소장은 "오간수문이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돼 있는 만큼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전체 시굴작업이 완료된 후에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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