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난 뭘 모르고 있었다.요즘 1980년대를 그리는 영화에서처럼 학교(상명여고) 그룹 사운드에서 보컬을 맡아 당시 여학교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나. 나는 그 날도 함께 하자는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나만의 '그곳'으로 나섰다.
그 때 나에게는 또래 친구들이 즐겨 찾는 음악 DJ가 나오는 떡볶이 집보다는 접하기 어려운 팝송이나 금지곡 LP를 소장한 신촌의 '레지스땅스'라는 음악카페에 가는 것이 큰 낙이었다. 서너 시간 음악을 듣고 나서 다시 남영동의 한 음악실을 찾았을 때였다.
"이렇게 곡 주기가 어려워서야…. 대체 이 곡이 어떻다는 거야? 그만둬야지… 그만." 누군가 절망하듯 몇 장의 악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야,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냐? 신인 작곡가는 이래서 힘든 거야! 인기 있는 가수가 어디 만나나 주던? 세건아, 기운 차려." 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쓰레기통에 처박힌 악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이거 저 주시면 안돼요? 제가 부를게요."
작곡가 이세건씨는 약간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쟤는 누구예요?"하고 물었고 음악실 사장은 "응! 노래 배운다고 온 학생인데 얼마 안 됐어" 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부르든, 찢어 버리든…." 이세건씨는 어찌 되든 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곡을 준 그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받은 악보의 가사를 약간 수정해서 학교 친구들에게 불러 주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1년 뒤인 84년, 나는 인천전문대에 들어가 '4막 5장'이라는 음악서클의 보컬이 되었다.
우리 서클에서는 단합대회 겸 학교 서클도 홍보할 겸 대천에서 열리는 해변가요제에 참가하자고 했고, 선배 중 누군가 곡을 만들어 가벼운 마?0습막? 출전했는데 아쉽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아쉬워하는 선배들에게 먼저 올라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혼자 시외버스를 탔다. 그 안에서 나는 강변가요제 참가 모집 광고를 들었다. 바로 그 날이 접수 마감일이었다.
나는 그 길로 접수처를 찾아가 길 모퉁이에서 참가신청서를 작성하고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1년간 나와 함께 하며 내가 힘들 때, 혹은 나를 알리고 싶을 때마다 부르던 그 노래.
"난 왠지 네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나! 한 번만 더 불러줘! 선희야∼ 너 꼭 가수 해라, 그럼 이 노래 매일 들을 수 있잖아." 친구들이 무척이나 좋아해 주던 노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삼각지 가로수 길을 걸을 때나 또 오후의 햇살이 내릴 때 나도 모르게 조용히 부르던 바로 그 노래. 나만의 ' J 에게'를….
이 선 희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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