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20대 시절 얘기다. 기독교사상연구회는 매주 토요일 명사를 초청, 강의를 들었다. 에밀 부르너의 '정의와 사회질서' 등 명저를 중심으로 독서회도 가졌다.내가 회장을 맡은 연구회는 30명이 주축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멤버가 쟁쟁했다. 박정수·정희경씨는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상설씨는 MBC감사를 역임했다. 김영창 목사와 고려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배호 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 출신의 김광일 박사 등도 꼽힌다. '정의와 사회질서' 독서회는 이 책의 번역자이자 당시 YMCA 총무였던 전택부 선생이 지도했다.
한편으론 대중 강연회도 열었다. 김재준 목사와 연세대 철학과의 김형석 목사, 함석헌 선생, 서울대 사범대학장 김기석 교수 등이 연사로 나섰다. 나는 당돌하게 이들 거물 사이에 끼어 강연을 했다.
내 강연은 제법 인기가 높았다. 1954년 봄에는 이화여대 채플 시간에 초청됐다. 연구회 멤버이자 당시 이대를 다닌 김혜원(김재준 목사의 딸)씨는 "개교 이래 채플 시간에 초청된 20대 연사는 김 선생이 처음"이라고 귀띔했다. 스물 여섯 때 였다.
53년 겨울 외국책 장사를 하다 5년 선배한테 사기 당하면서 접은 사업가의 꿈도 다시 꿈틀댔다. 이듬해 늦봄에는 친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이름이 인쇄된 노트를 만드는 공장을 세워 대표를 맡았다. 책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셈이다. 이름은 '주식회사 신교사(新敎社)'로 일본의 기독교 서적 전문 출판사를 본 따 지었다.
지인, 특히 김영선 의원의 도움은 당시 사업에 큰 힘이 됐다. 김 의원은 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때 경찰을 피해 동대신동 우리집에서 숨어 지내는 등 인연이 각별했다. 그는 송인상 한국은행 부총재를 소개해줬고 덕분에 나는 부흥부 담당자와 접촉할 수 있?%駭?.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는 데 이를 집행하는 기관이 부흥부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나는 노트 제작용 갱지 10만 달러 어치를 수입했다. 매우 큰 돈이었다. 연구회 멤버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20대 청년 사업가로는 굉장한 수완을 발휘한 셈이다.
신교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문교부도 물심양면 도와줬다. 그 때도 나의 사업 명분은 조직 즉, 연구회 운영 자금을 마련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사회 개혁 조직을 더 큰 규모로 키우기 위해서는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신교사를 창업한 지 후 1년 쯤 지나 통영수산학교 동창인 하정모가 찾아왔다. 그는 (주)제일생명의 실세라고 했다. 그의 권유로 나는 제일생명 주식 50%를 사들였다. 그리고 자유당에서 문화부장을 역임한 심 문 장로에게 주식 20%를 양도하고 사장으로 모셨다. 나는 상임 감사가 됐다. 나는 초창기 금융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의욕이 대단했다. 당연히 신교사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제일생명 개척에 투입했다.
하지만 보험은 일반인에게 생소했다. 개척비와 인건비만 계속 날리는 상황이었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이었다. 그러다가 스물 여덟 때인 56년 가을 제일생명 주식을 모조리 채권자에게 넘기게 됐다. 주식으로 치면 손절매 시기를 놓친 셈이다. 결국 신교사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사업을 확장한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서울을 떠났고 기독교사상연구회도 해산됐다. 30년 뒤인 86년 만난 초동교회의 조향록 목사는 "김 선생, 당신이 그 모임의 구심점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지니 연구회도 자연 붕괴됐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사업에 실패한 나는 부산에서 살 길이 막막했다. 동아대를 졸업할 때 따 놓은 고등학교 국어 %C정교사 자격증도 쓸모가 없었다.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꺾일 수는 없다는 오기도 있었다. 나는 또 다른 사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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