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었던 계곡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몇 번의 강추위와 가끔씩 내린 눈으로 계곡 곳곳이 농도짙은 흰색에 묻혀있었지만 그 무엇도 계절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는 법.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계곡은 어떤 모습일까. 하얀 겨울의 기운을 물리치고 봄의 전령을 실어오는 맑은 계류. 삶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충북 괴산군의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을 찾았다. 국립공원 속리산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계곡이다. 약 10리의 거리를 두고 흐르는 두 계곡의 물은 각기 다른 모습이다. 너무나 유명한 곳이어서 날씨가 따뜻해지면 사람의 행렬에 모든 것이 묻힌다. 여유있는 여행을 원한다면 지금부터 4월말까지가 좋다.
화양계곡은 가슴이 따스한 남정네 같다. 넓은 계곡과 우람한 바위는 자질구레한 화장을 하지 않았다. 계곡물은 완만하게 흐르고 나무들은 굵다. 모두 아홉 곳의 명소가 있어 화양구곡으로도 불린다.
이 계곡은 조선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계곡이다. 그는 이 곳에 터를 잡고 화양서원을 세웠다. 화양서원은 조선말 권력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 나라의 정치판을 쥐락펴락했다. 그래서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 첫 칼을 맞았고, 서원은 거의 터만 남았다. 지금 서원 뿐 아니라 송시열 유적의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화양구곡이라는 명소도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그중 으뜸은 암서재(岩棲齋). 물가에 놓인 공부방이다. 송시열은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을 골라 집을 짓고 말년에 그곳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물가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를 주춧돌 삼아 방 한 칸짜리 집을 올렸다. 원목의 색깔을 그대로 살린 옛 건물은 깊은 자연 속에서도 전혀 튀지 않는다. 자연에 %녹아든 인공. 선인의 심미안에 감탄할 뿐이다.
암서재의 바로 앞은 금사담(金砂潭)이다. 이름대로 풀이하면 금모래가 가라앉아있는 연못이다. 그러나 금모래는 없다. 대신 잘 닦여진 금빛 너럭바위가 있다. 얼음이 풀리면 사람들이 올라 앉는다. 지금은 얼음이 살짝 덮여있다. 눈 녹은 물이 점점 기운을 더하면서 금사담의 얼음 한 귀퉁이를 밀어냈다. 맑은 계류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흐른다. 여인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 같다.
화양계곡의 상류인 선유동계곡은 여성스럽다. 아기자기하면서 화려하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광에 취해 오래 머물렀다. 이황은 아홉 곳의 절경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선유동구곡이라고도 한다.
계곡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곳은 와룡폭포. 비스듬히 누운 바위를 타고 계곡물이 흐른다. 주변 바위가 사람이 올라가기에 적당하게 배열돼 있어 폭포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조망할 수 있다. 지금은 얼음이 끼어있다. 군데군데 얼음을 깬 물의 모습이 비친다.
와룡폭포의 상류로는 기암의 연속이다. 계속 돌을 타고 물을 따라가면 바위 계곡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계곡을 걷다보면 여기저기서'쩡! 쩡!'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계곡의 얼음이 깨지는 소리, 겨울이 깨지는 소리이다. 충북의 자랑거리인 두 계곡은 관리가 '지나치게' 잘돼 있다. 계곡 끝까지 올라도 신발에 흙이 묻지 않을 정도로 길이 포장돼 있고 가로등까지 설치해 놓았다. 흠이 있다면 그게 흠이다.
/괴산=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중부고속도로 증평IC에서 빠져 좌회전, 증평(510번 지방도로)-청안-부흥-금평(이상 592번 지방도로)을 거치면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 입구가 나온다. 서울서 약 3시간. 청주에서 화양계곡과 선유동계곡의 중간지점인 송면리행 직행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화양곁계곡(화양계곡 관리사무소 043-832-4347) 입구에 대규모 민박단지가 있고 계곡 군데군데 자리잡은 식당도 민박을 친다. 선유동계곡에서 민박하려면 주차장 앞 선유의 집(833-8056)을 찾으면 된다. 보은(속리산관광호텔 542-5281)이나 증평(증평파크관광호텔 836-9889)엔 상급숙박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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