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세희는 늘 인간의 맨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요. 그가 세상의 낮은 곳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얘기를 들으면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연배가 그보다 위아래인 작가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느낄 수 없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섬세하고 진동수가 빠를 수가 없어요. 조세희는 내가 안 갖고 있는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을 자전거나 차를 빌려 타듯이 빌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 점은 제 작업에도 많은 시사와 도움을 줍니다. 조세희는 내게 친구이기도 하고 스승이기도 하지요." 출판사 열화당 이기웅(64) 대표(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이사장)는 30년 지기인 소설가 조세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자를 만나기 하루 전인 12일에도 조세희가 찾아와 소주잔을 기울였다.마침 한국일보에서 두 사람의 인연을 취재한다는 얘기를 하자 조세희는 당초 손사래를 쳤단다. 세상에 드러나기 싫어할 법한 그다운 반응이었다.
"취재하러 올 기자에 대해 한참 설명했더니 정 그렇다면 좋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기에 대해 묻거든 '남미 같은 제3세계를 비롯해 세상은 너무 못된 상태로 가고 있다. 뭔가 나아지리라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뜻 있는 사람들이 노력해도 나아질 희망이 안 보인다.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절망감이 온다.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그런데 이기웅을 만나면 위로가 된다'라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내가 위로가 된다니 정말 고맙더군요."
두 사람은 "코드가 전혀 안 맞으면서도 잘 맞는다"고 한다. 이기웅은 그 유명한 선교장(강원 강릉) 집 아들이다. 열화당을 대표적인 미술출판사로 일궈냈고, 파주 북 시티를 도시계획사적으로도 희귀한 모범사례로 만들어냈다. 출판밖에 모르는 출판인이었다면, 그저 그런 업자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조세희는 많은 이들에게 1978년 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살아 있다. 이 과작(寡作)의 작가는 그 후 사북 탄광의 현실을 담은 사진집을 불쑥 들이미는가 하면 오늘도 노동 현장과 전국을 카메라를 메고 누빈다. 신문에 드물게 등장하는 그에 관한 기사들은 그가 변함 없이 남들이 맘 편히 잊고 사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의 코드는 세상과 예술에 대한 순수함인 것 같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75년 서울 청진동 열화당 사무실에서였다. 당시 '문학과지성'(문지)이 열화당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는데 진학사 편집장으로 문지에 작품을 연재하던 조세희가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안면을 트게 됐다. "당시 조세희는 일부러 가난을 택한 사람 같았어요. 생활에 절제가 있었고 가난이라는 긴장감을 갖고 사는 것이 제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까다롭고 말수가 적었지요." 두 친구는 1940년생 동갑이다.
78년 문지에서 낸 '난쏘공'이 이듬해 동인문학상을 타게 됐다. 시상식 후 꽃을 들고 택시를 잡느라 우왕좌왕하던 조세희를 이기웅이 포니 자가용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둘은 가까워지게 된다. 그 때 아홉 살 난 조세희의 아들 중협은 지금 자기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8년째 열화당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사회생활에 관해서는 제가 중협이의 대부이지요."
두 친구는 어떤 의미에서 '희망구 행복동'(소설 난쏘공의 배경으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계를 역설적으로 상징한다)을 찾는 길동무 같다. 조세희는 2000년 이기웅이 낸 사진집 '세상의 어린이들' 서문에서 80년대 강운구(사진작가), 이기웅과 함께 셋이서 국토여행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우리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상처 입힌 '지금 이곳'이 아닌, 여전히 '보다 나은 다른 곳'을 꿈꾸는 이기웅을 나는 믿는다"고 적었다.
/이광일기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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