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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보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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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보수의 위기

입력
2004.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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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한나라당이 지난 9일 국회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과 이라크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당의 인기가 더 떨어지고, 총선 전망이 깜깜해졌을까.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농민 단체와 파병 반대자들이 한나라당 당사로 몰려갔겠지만, 다수의 국민은 한나라당의 어려운 선택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주목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진정 '차떼기'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힘든 선택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FTA와 파병안 대신 서청원 석방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패혐의로 구속된 동료를 위해 동원됐다. 한나라당은 '정당'에서 '집단'으로 추락했다.

국민은 경악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한나라당의 불법자금 규모에 분노하면서도 한나라당의 역할을 인정하던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검찰이 편파수사로 한나라당을 죽이려 한다고 분개하던 사람들조차 한나라당의 '자살골'에 말을 잃었다.

물론 파행 국회의 책임이 전적으로 한나라당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당도, 열린우리당도 치졸했다. 리더십은 커녕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정치도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당이 파병안과 FTA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상황에서 왜 한나라당이 총대를 메고 통과를 주도하겠느냐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금 눈 앞의 시비나 이해득실을 가릴 형편이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군소정당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위기일수록 정도를 가야 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궁지에 몰려 허둥대면 판단력을 잃어 자충수를 두게 되고 계속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9일 밤 서청원 석방결의안은 재적의원 220명중 찬성 158, 반대 60, 기권 2표로 통과됐다. 한나라당 의원 147명 중 구속된 7명을 뺀 140명 대부분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에 나름대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다수가 이성을 잃고 '자살골'에 협조할 수 있는가.

정당은 흥망성쇠를 겪는다. 시대의 변화, 유권자들의 요구를 읽지 못하는 정당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97년 대선에서 정권을 잃고도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의석 수를 내세워 여전히 오만했고, 여전히 부패에 무감각했고, 정쟁 이상의 정치를 하지 못했다. 2002년 대선에서 또 지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청원 석방결의안은 한나라당의 의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나라당의 불법자금에 대한 수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전체 규모가 1,000억대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편파수사 논란이나 변명, "너도 받지 않았느냐"는 공격으로는 헤어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무조건 잘못을 인정하고 완전히 다른 정당으로 탈바꿈하지 않고는 재기하기 어렵다.

그 동안 우리사회에는 보수다운 보수, 양식을 가진 보수가 드물었다. 정권에 적당히 협조하고 민주화나 인권 등의 문제에는 눈을 감으면서 반공, 친미, 자본주의를 외치는 게 고작이었다. 지난 대선 결과는 '성장할 줄 모르는 보수' '오만하고 배타적인 보수'에 대한 사회적 염증의 폭발이었다.

보수는 지금 그 동안의 오만에 대해 공격받고 있다. 진보의 소리는 높은데 보수는 방어하기에도 힘이 달리는 상황이다. 참다운 보수, 도덕적 힘을 가진 보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

궁지에 빠진 한나라당을 동정하는 사람은 적지만, 보수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은 많다. 참다운 보수정당의 필요성이 절실한 시기에 보수를 대변해 온 한나라당은 자멸의 길을 가고 있다.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은 방황하고 있다. 총선이 겨우 두 달 남았다. 한나라당은 죽을 셈인가, 살 셈인가.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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