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이면 대구지하철참사가 빚어진 지 꼭 일년. 사고 직후 온 나라를 뒤덮었던 분노도, 슬픔도 이미 오래 전에 잦아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당시에는 그토록 요란했던 재발방지의 대책도, 추모사업의 약속이란 것들도 시간과 함께 점차 희미해졌다. 이제 온전히 남은 것은 살아남은 가족의 슬픔 뿐이다.김창윤(金昌允·49) 정경숙(丁京淑·48)씨 부부는 그날 아들 딸을 모두 잃었다. 자식(그것도 하나도 아닌)을 먼저 여읜 참척(慘慽)의 고통보다 더 한 게 있으랴.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견디며 그들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아이들이 떠나 비워진 그 자리에 더 큰 사랑이 필요한 아이를 받아들였다. 장성한 자식들을 창졸 간에 잃은 슬픔이야 여전하지만 그들은 새 아이를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사랑만이 끝내 절망을 치유할 수 있음을.
현실의 비극에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와 같은 음울한 전조(前兆)가 없다. 그것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때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노려 돌연 허를 찌르듯 덮쳐드는 법이다.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창윤씨 부부에게 덮쳐 든 비극도 바로 그랬다.
그날은 딸 향진이(당시 22·계명대 공예디자인4)의 졸업날이었다. 화사하게 성장(盛裝)한 딸은 동생 철환이(20·중앙대 건축1)와 함께 아침 일찍 대구로 떠났다. "우리 먼저 학교에 가 사진도 찍고 할 테니 엄마, 아빠는 졸업식 시간에 맞춰 오세요." 둘은 남달리 의좋은 남매였다. 속 한번 안 썩이고 잘 자라준 두 아이들의 맑은 표정이 어느 때보다 대견해 보였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부부는 9시쯤 포항 집을 나섰다. 그런데 11시 졸업식이 시작됐는데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통화도 되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에 평소 학교 갈 때 늘 타고 다녔던 버스회사에 전화를 했다. "오늘 버스운행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요." 식이 끝난 뒤 학과에서 마련한 다과회 자리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누군가 "지하철에서 불이 났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전했다. 학교 반대방향 열차에서 발화했다는 첫 전언(傳言)은 곧 양편 열차가 다 불길에 휩싸였다는 대형참사 소식으로 확대됐다. 황망히 지하철본부에 전화했으나 그때까지의 부상자 명단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시시각각 부상자들이 밀려들고 있다는 동산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거기에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중앙로역에 도착한 게 오후 4시께였다. (뉴스에서 숱하게 보았을 테니 그 아수라장 같던 상황 묘사는 생략한다)
현장에 나온 휴대폰업체 직원에게 아이들의 휴대폰 위치추적을 부탁했다. 잠시 후 돌아온 대답이 딴 세상의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중앙로역에서 끊겼습니다…." 통곡과 함께 주저앉는 아내를 김씨가 곧추 세웠다. "걱정 마. 우리 철환이가 얼마나 강한 아이인줄 알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유리창을 깨고서라도 나올 놈이야. 그러니까 우리 애들한테는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어!" 그러나 남매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 카메라와 휴대폰, 딸이 사귀던 '오빠'와 끼고 다녔던 커플반지가 유류품으로 돌아왔다. DNA 감식으로 판별했다는 남매의 시신은 6월 말 합동장례식 때 처음 보았다. '검게 그을려 몸통만 남은 이게 우리 아이들이라니….'
시신을 화장해 납골당에 안치하고는 그때까지 다른 유족들과 함께 기거해오던 대구 시민회관을 떠났다. 넉달 여 만에 돌아온 텅 빈 집, 거실 벽에 걸린 대형가족사진 속에서 두 아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전의 미소로 엄마 아빠를 맞았다.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니 사진을 떼자"는 남편을 아내가 한사코 막았다. 아내는 그 사진을 보며, 남매들의 방을 치우며 매일같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울다 울다 탈진해 몇 차례나 병원으로 실려갔다. 잇몸도 다 내려앉고 자고 일어나면 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집에서 아내를 달래던 남편은 회사 일을 마치면 혼자 밖에서 술에 기대어 울었다.
자식의 죽음에 관한한 시간은 결코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한달 여를 그렇게 보내다 퍼뜩 이렇게 무너져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억울하게 먼저 간 아이들에게도 차마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자. 향진이, 철환이에게 미처 다 쏟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자. 사랑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있을 테니.' 부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추슬러 휴일마다 전국의 입양기관들을 찾아 다녔다.
8월 울산의 기독교복지재단에서 한 여아를 만났다. 혈액형도 맞았고(부부는 B, O형에 아이는 O형이었다), 무엇보다 네살 나이가 적당했다. "갓난 아기는 자신이 없었고, 너무 자란 아이는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때부터 매주 울산에 가 아이와 얼굴을 익혔다. 하루종일 안고 놀아주는 일이었다. 부모의 사랑에 목말랐던 아이의 입에서 선뜻 "엄마, 아빠" 소리가 나왔다.
한 달쯤 지나서는 토요일마다 집에 데려와 하룻밤씩 재우고는 돌려 보냈다. 이런 적응기간이 보통 6개월 정도 필요하다고 했지만 매주 이별은 아이에게도, 김씨 부부에게도 점차 힘든 일이 되어갔다. 헤어질 때마다 아이는 울었다. 재단의 동의를 얻어 예정보다 훨씬 빠른 11월20일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부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 '김윤경'이라는 새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자식들을 모두 잃은 부부는 그렇게 다시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아이를 입양해 기르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컸을 윤경이는 그래서인지 잘 놀래고, 자주 울고, 떼가 심했다. 조금이라도 엄마와 떨어지면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냥 순하게만 컸던 두 아이와 종종 비교되며 속상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부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우리가 이렇게 힘든 데 어린 너는 얼마나 힘들겠니.'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가슴으로 전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정씨는 깨어있을 때도, 잠잘 때도 늘 윤경이를 품안에 안고 산다. "이젠 저도 나이가 들어선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아프고 힘들어요. 하지만 눈물과 희생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있겠어요? 두고 보세요. 세상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훌륭하게 키워낼 겁니다."
지난해 부부는 딸 아이가 다니던 학과에 도자기제작용 2,000만원짜리 전기가마도 기증했다. 크게 여유 있는 살림은 아니지만(김씨는 포항 'INI스틸' 주조부 주임이다) 보상금엔 아직 한푼도 손을 대지 않았다. 정말 뜻 있고 보람 있는 일을 찾아 소중하게 쓸 작정이다. 윤경이를 통해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찾았지만 그래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하루하루가 힘겹다. 그날 이후 친구들의 자녀 결혼식 소식에도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 경사(慶事)에 혹 눈물을 보일까 두려워서다. 주변 이웃이 무심히 던지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평범한 인사에도 자주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번잡스럽게 뛰놀던 윤경이마저 잠들어 사위가 조용해지는 밤이면 어김없이 또 눈물이 북받친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단 하루도 울지않는 날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먼저 가야 했는지…. 아직도 현실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김씨 부부는 매달 납골당을 찾아 두 남매와 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언제나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착했던 너희들이 먼저 떠난 건 세상에 남은 우리가 그만큼 좋은 일 더 많이 하고 오라는 뜻이지? 그래, 엄마 아빠 그때까지 힘을 잃지않고 열심히 살께. 그러니 너희도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렴.…."
거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윤경이는 지루해 몸을 뒤채면서도 단 한 순간도 엄마 무릎을 떠나지 않았다. 칭얼대며 매달릴 때마다 정씨는 아이를 가슴에 꼭 보듬어 안았다. 아빠가 남매의 후배들이 만들어준 앨범을 꺼내자 윤경이는 얼른 손가락으로 얼굴을 짚었다. "언니, 오빠." "그래, 우리 윤경이 언니, 오빠야." 거실 높이 걸린 가족사진 속에서 두 남매가 잔잔한 미소로 이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겠다. 김씨 부부와의 인터뷰 시간은 다른 때보다 훨씬 짧았다.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음마다 두 사람은 매번 대답보다 먼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더 이상의 집요한 질문은 이들에게 차마 못할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기사를 포기하더라도. … 사실은 기자도 자주 목이 잠겨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