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온 현대엘리베이터 사태가 이번에는 정말 끝나나 했더니 또 한번의 주식매집경쟁으로 이어질 모양이다. '5% 룰'을 위반한 KCC가 11일 당국의 명령에 따라 사모펀드를 통해 매집한 주식을 처분해야만 하게 되었으나, 12일 곧바로 공개매수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경제문제는 무조건 시장원리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글로벌 스탠더드'적 시각에서 한 걸음만 비켜서 보면, 현대엘리베이터 사태는 우리 경제의 복잡한 작동원리를 잘 농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는 결국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나 경제의 작동원리는 시장원리와 정치·사회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결정된다.
한국에서 과거 이 원리는 '국가' '가족' '수출'이라는 세 단어의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강력한 국가가 수출주도 정책을 펴면서 대기업을 육성하였고, 급성장한 대기업은 자원의 동원 및 배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 사회조직인 가족의 구성원리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이후 과거 시스템의 해체와 정치적 민주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강력한 국가의 역할은 상당 부분 2선으로 후퇴하였다. 정치적 권위주의가 후퇴한 것은 좋으나 문제는 시스템의 공백이다. 운동경기로 치면 심판이 빠져버리니 선수들이 관중을 향해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현대엘리베이터 사태로 돌아가 보자.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매입은 처음에는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조카가 남긴 그룹의 경영을 돕는다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었다.
그 후 사모펀드 등을 동원한 본격적인 매집경쟁이 시작되면서는 현대그룹이 어느 '집안'에 귀속되는가라는 또 다른 가족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었다. 이것으로 부족하였는지 외국 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한다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도 동원되었고, 비록 무산되었지만 1,000만주 유상증자 건은 '국민기업화'라는 반시장적인 정서적 호소까지 동원되었다.
막상 그 결과는 어떠한가. 7개월여 지속된 사태의 진행과정에서 소액주주의 권익은 철저하게 무시돼 어디에도 간 데 없다. 외국 자본을 경계한다더니 오히려 외국 자본은 이를 계기로 엄청난 시세차익을 올렸다. 작년에 KCC측에서 주식매집을 위해 사용한 돈만 해도 연간 순이익의 3배가 넘는다고 한다. 불안하기는 정상적 기업가치로 평가 받지 못하고 매집경쟁이라는 투기적 상황에 내몰려 있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주들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와 규칙을 잘 만들고 가꾸어야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 시장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양측의 경영권 분쟁은 시장에 대한 신뢰를 점점 더 잃게 만들 뿐이다. 시장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 동원될 수 있는 회사의 주식을 산다는 것은 인생대박을 꿈꾸며 로또 복권 사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이 잘 지켜지도록 감시·감독하는 강력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것은 과거의 강한 국가와는 다른 의미이다. 과거의 국가가 기업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명령했다면, 새로운 의미의 강한 국가는 그런 명령을 극도로 자제하되 '게임의 규칙은 이런 것이니 여기에 맞추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국의 이번 결정은 논란의 소지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일단 잘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차제에 이번 사태에서 있었던 규칙위반과 이익침해 사례들을 모두 검토하여 처벌할 것은 처벌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게임규칙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가문의 영광이 시장의 교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계속해서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장 덕 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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