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억눌렸던 영국 노동자들의 숨통이 트이고 있다. 보수당 정부가 미뤄왔던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토니 블레어 정부가 비준, 유럽연합(EU)의 사회지침(Directive)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신장하는 내용의 노동관련 법안들이 속속 통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간 자율교섭원칙에 따라 비교적 법적인 보호장치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취약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이에 대해 일제히 손을 들어 반기고 있다.억눌렸던 영국 노조
비교적 자유롭게 파업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한 노동쟁의법(1906년) 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영국 노조의 세력은 1980년대 보수당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정부 이후 급격히 위축됐다. 대처 정부는 10여 개가 넘는 법안으로 단계적으로 노조를 압박했다. 노조가입을 의무화한 클로즈드숍이 불법화 되고, 1982년 고용법에 따라 임금이나 근로조건에 무관한 파업은 불법으로 규정됐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려면 노동조합법(1984)에 따라 우편 비밀투표를 통해 노동자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고, 사용자측에는 찬반투표 개시 7일 전까지 투표활동 사실을 통보해야 했다. 정치파업과 동정파업이 금지되고 피켓팅 활동도 파업 작업장 및 그 인근으로 축소되는 등 최악의 노동활동환경을 맞았다.
반면, 사용자측은 손해배상청구권과 노동쟁의 금지명령청구권뿐만 아니라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다. 80년 당시 54%였던 노동조합 조직률(전체 가입대상 노동자중 노조 가입자의 비율)은 최근 25% 수준까지 떨어졌다.
노사분쟁 해결기구인 알선중재위원회(ACAS) 토니 스튜드 상임 중재위원은 "80년대에는 노조를 굴복시키려는 대처 정부의 노동압박정책에 대해 노동계가 많이 반발했다"며 "전통적으로 대화로 해결하고 약속을 지키는 노사관계의 '신의'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노동자도 경영에 참여
그러나 영국 노조는 지난해 7월 발표된 '근로자의 정보와 협의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고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영정보 및 경영상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는 2001년 통과된 EU 사회지침을 도입하기 위한 조치로 지난해 초 영국노조를 대표하는 영국노동조합회의(TUC)와 대표적인 사용자단체인 영국산업연맹(CBI)측이 사전 협의를 거쳐 마련한 것이다. 사용자측은 노동자대표 선출 및 위원회의를 구성하고 고용관련 경영정보 제공 및 협의에 대한 의무를 진다.
2005년 직원 150명 이상의 사업장부터 시작, 2008년에는 50명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된다. 또 고용전망 및 정리해고를 위한 계약 변경, 기업조직 변동 내용 등을 알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은 서면으로 정보 공유를 요구할 수 있어 임금문제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됐다. 노사간의 기존 합의사항이라도 전체투표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40% 이상이 찬성만 하면 재협상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CBI측은 "EU지침 등으로 적용될 규제 때문에 노동시장 유연성이 떨어진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사용자의 59%가 EU 파견근로지침이 적용되면 추가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차별 금지법 등도 제정
영국 정부는 또 노사 합의로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었던 근로시간제를 변경, 지난해 8월부터 EU 근로시간 지침의 규정 대로 '주 48시간 근로제'를 엄격히 준수토록 했다. 앞서 2000년 5월에는 '파트타임 근로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 EU가 1997년 제정한 '시간제 노동자 차별 금지' 지침과 99년에 만든 '계약직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보호지침'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99년 암스테르담 조약에 따라 EU지침에는 국제법과 동일한 효력이 부여돼 이를 이행하기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유럽사법재판소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TUC 밴 할레이 공보관은 "일련의 조치들로 인해 억눌렸던 노동계가 다시 한번 기지개를 펼 수 있을 것"이라며 "EU지침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블레어 정부의 노동정책이 전환될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고성호기자 sungho@hk.co.kr
■英 알선중재위원회 "ACAS"
영국의 노조와 사용자단체는 노사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알선중재위원회(ACAS)를 활용하고 있다. ACAS는 노사 양측이 제시한 정보에 대해 비밀유지를 철저하게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공정한 입장에서 중재를 하고, 무엇보다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해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어 노사 양측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1974년 노사관계법에 따라 설립된 ACAS는 분쟁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업장 내의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국 전역에 11개 지방사무소와 런던에 본부를 두고 노동법, 노무관리 등을 문의할 수 있는 공동문의처와 함께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 노사공동위원회와 워크숍 등을 통해 개별 사업장내 노사문제가 파업 등의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예방하고 있는 것.
ACAS의 중요한 기능은 알선과 중재. 알선은 노사간 어느 측도 신청할 수 있는 집단적 알선과 개별 노동자가 법률로 정해진 권리보호와 관련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개별적 알선으로 나눠진다. 그러나 알선내용은 노사 양측에게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노동심판소에 제소된 사건은 ACAS에 전달돼 알선자를 선임하는 절차로 이뤄진다. 그러나 제소자가 원하지 않으면 곧바로 노동심판소에서 처리된다.
중재는 노사분쟁 당사자가 중재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합의해 공동으로 요청해 올 경우에만 진행된다. 그러나 노사 양측은 중재안과는 달리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는 ACAS가 제안하는 조정방법을 통해 논의하기도 한다.
ACAS의 가장 큰 특징은 노사관계 개선을 위해 자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것. 개별 사업장 내의 노사분쟁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자측뿐만 아니라 개별 노동자들에게까지 전화 상담과 방문상담, 개별 및 집단 교육, 세미나 등을 통해 일반적인 노사관리, 고충처리, 고용계약 등에 대한 자문을 해주고 있다. 개별 사업장 내에 노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 개별 노동자에게 인사관리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ACAS 토니 스튜드 상임 중재위원은 "자율교섭주의가 실패했을 지라도 노사양측은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알선중재위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 ACAS 시즌 정책국장
"개별 노동자들의 권리분쟁 요구가 영국노사문제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ACAS 본부 2층 회의실에서 만난 ACAS 케이시 시즌(사진) 정책국장은 노동자들이 강력한 노조를 결성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대변하던 시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고 단언했다. 시즌 국장은 "법률로 규정한 권리 등이 침해 받고 있다고 개별 노동자들이 전화상담을 신청하는 건수가 증가하고 있다"며 "노조측이 신청하는 집단적 알선보다는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신청하는 건수가 알선 요청건수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개혁정책과 제조업체의 몰락 등으로 영국 노동운동이 힘을 잃은 지 오래. 이에 따라 영국의 노동자들은 노조가입을 통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탈피해 동일임금법, 성차별법, 인종관련법, 고용법 등에 명시돼 있는 권리가 침해 당할 경우 노조를 통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이를 해결하고 있다.
시즌 국장은 유럽연합(EU) 지침에 따라 영국의 노동권이 강화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EU 지침이 서비스업을 주로 하는 영국 노동시장에 미칠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직장 내에서 임금 등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개별적으로 노동심판소를 통해 구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노조를 뒷받침했던 제조업체가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 유연화 정책 등으로 파트타임 일을 주로 하며 직장을 얻을 기회가 많아진 젊은이들이 노조가입을 꺼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즌 국장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사용자측과 약속한 근로조건 등을 지키기 않고 사업장 무단 이탈 등을 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며 "중립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사용자뿐만 아니라 개별 노동자들도 의무를 저버린 채 자신들의 주장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런던=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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