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2월 17일김태식 WBA 플라이급 타이틀 획득
한국 복싱에서 가장 화끈했던 복서를 꼽으라면 단연 '돌주먹' 김태식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77년 12월 19세때 한국신인왕전 MVP로 뽑히면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160㎝의 '작은 거인'. 프로데뷔전에서 3회 TKO패 했을 뿐 이후 8전7승에 6연속 KO승. KO승도 6회까지 간 것이 한 번이고 나머지는 1∼3회에 끝내 버렸다.
아마추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프로에 입문한 그는 최경량급인 주니어플라이급이면서도 펀치력은 라이트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또한 도장에서 기량을 익히기 보다는 골목에서 실전을 닦아 상대의 약점을 빨리 간파하고 게임을 풀어 나가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80년 2월 17일, 데뷔 2년 5개월만에 WBA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와 마주섰다. 왼손잡이 이바라는 상대를 교란시키려는 듯 공이 울리자 오른손잡이처럼 왼손 잽을 던지며 링을 맴돌았다. 하지만 1분도 안 돼 김태식의 소나기 펀치가 안면과 복부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챔피언은 2회 1분 11초만에 캔버스에 쓰러졌다.
'두발로 걸어 다니기 시작한 이래 싸워서 져 본 적이 없다'는 그는 총 4분 11초의 경기중 무려 221개의 펀치를 날렸다. 1.13초에 1개 꼴. 음력 정월 초이틀의 명절 분위기에 젖어 있던 국민들은 신정연휴 마지막날(1월 3일) 김성준의 WBC 라이트 플라이급 패배로 생겼던 응어리를 말끔하게 풀 수 있었다. 또 박찬희가 WBC 주니어 플라이급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은 한 체급의 양대기구를 석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전속결의 김태식 돌풍은 너무 허무하게 가라 앉았다. 그는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진 2차 방어전에서 피터 마테블라(남아공)에게 15회 판정패를 당했고, 한국은 이 해에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 김태식이 내리 져 2년 3개월만에 다시 타이틀이 하나도 없는 무관이 되었다.
김태식은 81년 8월 WBC 플라이급 챔피언 안토니오 아벨라(멕시코)에게 도전했으나 처절한 난타전 끝에 2회 KO패. 82년 9월에는 대구에서 WBC 세계9위인 멕시코의 로베르토 라미레스와 논타이틀 전을 가져 판정에서는 이겼으나 내용은 후에 한국인 주·부심이 자격정지의 징계를 당할 정도의 졸전이었다.
김태식은 경기후 머리가 아프다며 구토증세를 보이고는 병원에 실려가 5시간 여의 뇌수술을 받고 링을 떠나야 했다. 그는 뒤늦게 초등학교때 4층 건물에서 떨어져 3시간만에 깨어나고 복싱을 하면서도 뇌에 이상을 느꼈으나 이를 숨겨왔음을 털어 놓았으며 '기본기를 중시해야 장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1976년 2월 17일
유제두 WBA J미들급 타이틀 상실
75년 6월 유제두(27)는 일본의 신화적 존재였던 와지마 고이치(32)를 7회 KO로 눕혀 한국의 첫 세계챔피언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마징기에게 빼앗겼던 WBA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7년만에 찾아 오면서 일약 한국복싱의 영웅이 되었다.
상대가 백전노장 와지마인데다, 그것도 적지에 들어가 벌인 경기였기에 감격은 더욱 컸다. 곧바로 정치인들이 앞장서 후원회를 구성했고 그의 성장과정을 그린 '눈물 젖은 샌드백'이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유제두는 1차 방어전에서도 일본의 마사코 마사히로를 6회 KO로 물리쳐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일본에 가면 만신창이가 되던 시절, 유제두가 두 번 연속 통쾌한 KO승을 거두자 재일동포들은 목놓아 울었고, 국내의 환성도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76년 2월 17일, 하루 종일 저녁 8시를 기다려 TV 앞에 모여 앉은 국민들은 한시간 동안 악몽을 꾸었다. 차라리 고문이라고 할 정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유제두는 소위 '개구리 점프'를 하며 초반부터 발빠르게 움직이는 와지마에게 연속 얻어 맞기만 할 뿐 제대로 카운터 펀치조차 내뻗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함에 분통이 터진 국민들은 차라리 유제두가 빨리 쓰러져 경기가 끝나기를 바랄 정도였다. 유제두는 결국 마지막 15회를 1분여 남기고 무릎을 끓었다.
경기전에는 일본 언론까지 온통 유제두의 승리를 예견하는 분위기였다. 와지마는 기자회견장과 트레이닝장에도 감기에 걸렸다며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모두 위장 전술이었다. 와지마는 승리 후 "8개월 전 타이틀을 잃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오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불꽃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와지마는 '한번 진 상대에게는 결코 다시 지지 않는다'는 선수. 하지만 유제두도 일본 선수와 26번 싸워 단 한번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긴 '일본 킬러'였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경기에 대해 '석연치 않다'는 반응과 함께 '1억엔을 받고 타이틀을 넘겨 줬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여기에 유제두가 귀국 후 "링에 올랐을 때 힘이 쭉 빠져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 파문을 증폭시켰다.
"무리한 체중감량이나 컨디션 조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그렇게 힘이 빠질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물 중독이 된 것 같다. 원통해 참을 수 없다."
이후 프로모터, 트레이너와 결별한 유제두는 5년 후인 81년 "당시 계체량 통과 후 트레이너가 준 딸기와 꼬리곰탕을 먹었는데 호텔에 돌아 와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고, 두시간쯤 뒤 일어나서도 전혀 힘이 없었다. 링에 올라가서는 두 손을 들기가 어려울 정도였다"며 관계기관에 진상을 밝혀 달라고 진정했으나 검찰 조사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는 79년 8월 56전 51승(29KO)2무3패의 기록으로 11년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21차례 동양타이틀 방어기록은 아직도 살아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前권투선수 유제두
"내 생활은 항상 꾸준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권투를 배워 그것으로 성공했는데 무슨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 기술을 후배들에게 물려 주는 게 보람이죠."
선수시절 착실하게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진 유제두(58)는 은퇴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줄곧 태양체육관(805-6577)과 태양프로모션을 운영하고 있다. 83년 구로구 독산동에 지은 지상 4층, 지하 1층 건물에는 자신의 살림집과 체육관이 있고 두 층을 사무실로 임대하고 있다. 체육관은 70평으로 복싱 체육관으로서는 가장 큰 편.
선수시절 태어 난 2남1녀가 운동을 하겠다면 적극적으로 시켜 볼 생각이었으나 모두 운동보다는 공부를 잘해 고교 때 1∼2등을 하고 명문대에 진학했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큰 아들(31)이 언론사에 들어가 복싱기사를 썼으면 좋겠는데 무역회사 다니고 있어 좀 아쉽고 둘째인 딸이 오빠보다 먼저 결혼해 손주 보는 재미를 선물했다고 자랑.
그는 지금도 증거가 없어 못 밝힐 뿐이지 와지마와의 경기때에 약물에 중독됐던 것은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꼭 타이틀을 되찾은 후 인터뷰에서 '내가 와지마에게 졌던 것은 실력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였다'고 당당히 외치고 싶었는데 기회를 못 잡은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한다.
"다음 해 프로모터가 임재근과 싸워 이기면 세계타이틀에 도전시켜 주겠다고 해서 받아 들였죠. 임재근이 한체급 아래(주니어 미들급)라 이겨야 본전인데다 임재근의 주먹이 워낙 세 마음은 없었지만 명예회복 기회를 위해서 수락하고 7회 KO로 이겼어요. 그런데도 약속을 안 지키고 임재근을 와지마를 누른 새 챔피언 에디 가조(니카라과)와 붙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 후로 복싱에 흥미를 잃었지요."
자신이 갖고 있던 동양타이틀을 반납하면서는 처음 프로모터로서 후배 박종팔과 캐시어스 나이토(일본)의 챔피언 결정전을 주선했다. 이후 IBF 주니어밴텀급 챔피언이었던 장태일과 도전자 차남훈 박정오 장영순 등을 키웠고 지난해 박환영(웰터급)과 전원보(라이트급)를 범아시아(PABA)챔피언으로 만들었다. 박환영은 WBA 타이틀에 도전시켜 볼 계획이다.
그는 김기수가 세상을 뜬 후 세계챔피언 출신중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들어 프로복싱 중흥에 힘이 되어 보자고 생각했으나 개인운동을 한 선수들이라 그런지 모여지지 않았다. 대신 서울 경기지역 체육관장들의 모임인 '권우회'를 만들어 3년간 회장을 했으나 이것도 4년전부터 흐지부지 되어 이제 체육관 일에만 몰두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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