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산업계는 첨단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기술 유출 미수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외국 기업이 한국 기술을 탐냈다는 사실도 놀라왔지만, 인사에 불만을 품은 회사 임원이 수 조원의 가치가 있는 첨단 기술을 외국에 넘기려 했다는 저간의 사정이 화제를 낳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전 달 터졌던 휴대폰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기도 사건 역시 돈에 매수 당한 연구소 소장과 연구원들의 소행이었다.지난 5년간 산업스파이로 인해 국내 산업이 입는 손실은 총 22조원으로 추정된다. 위의 두 사건이 적발되지 않았다면 3조5,000억원이 더해진다. "이처럼 엄청난 손해가 기업 내부의 부패로 인해 발생한다니, 안타까운 일이죠." 국내 유일의 산업 방첩(防諜) 기관인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 강영오(가명) 팀장은 "산업스파이라면 으레 국내 기술을 훔치러 온 외국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과거 사례의 99%가 국내인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기업 내부의 부패와 싸운다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산업스파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우리 기술의 해외유출을 막는 일을 맡고 있다. 국정원이 조직 개편을 한 뒤 산업기밀보호센터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들에게서 정보 요원에게 기대했던 날카로운 인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일하기 좋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장준희(가명) 과장은 "산업스파이의 대부분은 평범한 우리의 직장 동료"라며 "국내외 사례를 보더라도 돈이나 치정에 얽힌 내부인의 소행이 많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2002년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실리콘 밸리의 일반 연구원 2명 중 1명은 잠재적인 산업 스파이'라고 주장했다.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를 거액의 돈으로 유혹하는 것은 어린애를 사탕으로 유혹하는 것보다 쉽다는 얘기다. 여기엔 치정에 얽힌 사건도 있다. 1989년 크레이그 스펜서라는 남자가 미국 경제부처의 고위 관리를 대상으로 남창(男娼) 활동을 하면서 산업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그가 빼낸 정보는 일본무역진흥회(JETRO)를 통해 일본 기업들로 흘러 들어 갔고, 당시 미국 산업에 수십억 달러의 피해를 끼친 것으로 추정됐다. 장 과장은 "외국 스파이가 경쟁자로 등장하는 007 영화는 낭만적인 시대의 이야기"라며 "산업 평화를 위협하는 대상은 항상 내부의 적"이라고 강조했다.
예방과 사전 정보 습득이 가장 중요
이들의 평소 활동은 산업스파이 예방과 색출이다. 한번 유출되면 돌이킬 수 없는 산업스파이 사건의 속성상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바이오분야 등 우리나라가 경쟁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의 기업체와 연구소를 중심으로 각종 보안 시스템 구축 및 운용을 컨설팅하고 있다. 특히 핵심 연구원이나 고위 임원들이 불순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안 의식 고취를 위한 홍보 및 정기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이미 진행중인 기술 유출 시도에 대비해 기업 내부의 수상한 동향도 파악한다. 강 팀장은 그러나 "강제 수사권이 없는 현재로서는 일반적인 정보 수집 활동이외의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신고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 신고를 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업 임직원들이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홈페이지(www.nis.go.kr)에 사이버 상담소를 만들고 산업스파이 신고 핫라인(국번없이 111번)도 개설했다. 제보를 통한 작은 실마리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보안장치의 힘을 빌려 놓칠 뻔한 산업스파이를 잡아내기도 한다. 장 과장은 "기업내 정보 유출차단 장치를 통해 산업스파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거나, 건물의 출입장치나 공항 검색대에서 간발의 차로 기술 유출을 막은 적도 여러 차례"라고 말했다. 최근 밝혀진 A사의 첨단 반도체 기술 유출 미수와 PDP 기술 스파이 사건, 첨단 LCD 기술 유출 사건 등 12조 5,000억원에 상당 하는 피해가 이렇게 예방됐다. 1998년 이후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적발해낸 산업스파이 건수는 총 41건, 액수로는 31조원에 이른다. 정부 1년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이처럼 막대한 국부의 유출을 막았다는 보람이 산업기밀보호센터 직원들을 지탱하는 힘이다. 실제 수사과정에서는 어려운 일이 많다. 국정원 요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기피인물로 취급되거나 산업 스파이 조사를 빌미로 기업 내부를 감찰하려 든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특히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기업이나 해당 기관의 협조를 받을 수 없어 겪는 애로가 크다. 산업스파이의 행위를 적발, 증거까지 모두 확보했는데도 재판 과정에서 영업상의 비밀이나 기밀 유출을 사주한 상대방 기업과의 관계 때문에 처벌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요즘 중국계 기업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이 국내 정보기술(IT)을 바짝 뒤쫓고 있는데다 근래 발생한 산업스파이 사건의 70%가 중국·대만 기업이 관계돼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방심은 곧 양국간 기술 역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윤영수(가명) 부장은 "우리 산업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외국 산업스파이 위협도 증대되고 있다"며 "기술을 뺏기는 것이 곧 영토를 뺏기는 것이란 각오로 방첩 활동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각국 산업방첩 조직
'자본주의의 승리 이후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군사력 이상으로 산업 경쟁력이 중시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각국은 산업스파이 예방에 정보 능력을 집중하고 있다.
세계 산업스파이의 60%가 몰려있다는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관세청, 군정보기관 등 11개 기관이 연방방첩국(NCIX)를 구성, 연인원 3만 여명을 산업스파이 방지에 투입하고 있다. FBI만 해도 전국에 56개의 지부를 두고 주요 기업과 연구 단체, 대학들을 대상으로 기술 유출 예방 활동을 펼치고 있다.
러시아는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를 중심으로 산업스파이 차단에 나섰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핵무기, 우주선, 전투기 등 핵심기술을 습득한 과학자들이 서방으로 탈출하는 일이 잦아지자 전담반을 구성, 주요 기술 인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집중 관리하고 있다.
영국의 MI5는 국내 산업 방첩을 담당하며 MI6는 해외 산업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자국 정보기술(IT)의 보호이외에도 중동 국가로 핵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방첩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 일본의 내각정보 조사실과 중국 국가안전부 등도 인력의 상당수가 산업 방첩에 동원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국가정보원이 93년부터 산업스파이 색출 및 보안 교육을 위한 상설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정원 2차장 아래 직속 조직으로 개편돼 대규모 인력이 충원 됐다. 인력 구성이나 조직 규모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국정원 관계자는 "정치·군사를 넘어선 '포괄적 안보' 개념에 따라 정보·방첩 기능의 중심을 산업기술 분야로 확대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정철환기자
■ 산업스파이 역사·수법
유래 역사에 등장하는 첫번째 산업스파이 행위는 비단의 유럽 전래다. 552년 중국에 건너갔던 수도사들이 뽕나무 씨앗과 누에를 지팡이에 숨겨 탈출,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안 황제에게 바쳤다. 751년에는 탈라스에서 당나라의 명장 고선지를 패배시킨 아랍인들이 중국의 제지공들을 납치해 제지술이 서구 문명에 전파됐다. 1363년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온 일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산업스파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무렵에는 영국이 중국과의 차 무역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차 재배법을 훔쳐내 인도에서 차 재배를 시작했다.
수세기 동안 산업스파이 피해국 입장이었던 중국은 오늘날 일본에 이어 세계 최대의 산업스파이 국가로 변모했다. 지난해 8월 미국 FBI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 내 3,000여개의 유령단체를 통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체 산업 스파이피해의 70%가 중국계 기업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법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문서를 훔쳐내는 행위다. 핵심 기술자의 주변에 접근해 미인계로 꼬여내거나 납치하는 것도 같은 범주. 최근에는 경영컨설팅이나 기술자문, 합병을 위한 경영실사 등의 방법으로 상대 기업의 기술을 빼내는 경우가 많다. 경영상태가 어려운 기업의 핵심인력에 접근해 금품과 전직을 미끼로 기술을 요구하거나, 위장으로 합작업체를 설립해 기술 자료만 얻으면 계약을 파기하는 것도 흔한 수법이다. 정보를 엿듣거나 복사해 내기 위해서는 녹음기와 초소형사진기가 주된 수단이다. 최근에는 중요 정보가 들어있는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복사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들어가 해킹하는 사례가 많다. 무선 통신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도·감청 기술도 발전했다. 휴대폰 도청 논란은 비근한 예다.
/정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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