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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선행학습 현장르포/초등 6학년 "난 특목고반, 난 서울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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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선행학습 현장르포/초등 6학년 "난 특목고반, 난 서울대반"

입력
2004.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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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사설학원 중1 예비반. 초등학교 6학년 대상의 수업인데도 특수목적고, 서울대, 연·고대반 등 10개 반이 편성돼 있다. 한 반 인원은 20명. 오후 5시가 지나자 한 두 명씩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해 어느새 10평 남짓한 교실을 꽉 메웠다.이들은 영어듣기, 영문독해, 영문법, 수학, 국어, 과학 등 빽빽하게 짜인 시간표에 따라 밤 10시까지 수업을 계속했다. 한 학생은 "수개월 전부터 중학교 과정을 공부해왔기 때문에 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학생은 "당장은 알 것 같은데, 나중에 가면 잊어먹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이 학원에는 3월 중학교에 입학하는 100여 명의 예비 중학생이 선행학습에 열중하고 있다. 대부분 2월 말이면 중1 과정을 마치지만, 특목고 대비반 등 우수반 학생들은 이미 중2·3 과정에 해당하는 심화과정에 들어가 있다. 이 학원 원장은 "학원의 규모가 크고 종합반이어서 선행학습의 정도가 그나마 덜한 편"이라며 "대치동 주변의 단과학원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과정을 배운다"고 귀띔했다.

선행학습 열풍의 진원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이 일대 대로변의 풍경은 여느 동네와는 판이하다. 건물마다 각종 입시학원이 빼곡하게 들어 차 그야말로 '학원 천국'이다. 초등학생 대상의 선행학습을 내건 학원들은 주택가로 접어드는 골목에 주로 자리잡고 있다.

길거리에서 만난 이재성(8·D초등 6학년)군은 "반 친구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선행학습을 하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중3까지 공부하는 아이도 있다"고 말해 대치동이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이유를 실감케 했다.

특히 이 지역에는 2∼3명의 소수정예로 운영하는 고액의 선행학습도 성행하고 있다. 대치동에서 단과 전문학원을 운영하는 A씨는 "원어민 강사가 영어로 중학과정을 미리 가르치는 학원도 여러 곳 있다"며 "이 중에는 과목 당 100만원 가량을 받는 고액 학원도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3∼4년 전부터 본격화한 선행학습 열풍은 예습의 수준을 넘어 1∼2년치 과정을 미리 배우는 것이 이미 보편화했다. 때문에 시·도 교육청은 선행학습 과외를 받는 학생에 대해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 등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선행학습은 학생들을 교사 의존형 학생으로 만들고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하는 등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더러, 기존 공교육을 사실상 붕괴시킬 우려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은 "두 세달 미리 공부하는 것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초등학생이 중학교 과정을 경쟁하듯 미리 공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선행학습은 교실에서의 감동과 흥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선행학습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대학입시를 향한 무한경쟁 대열에 들어선 중고생과 학부모들을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학원 관계자나 학부모들은 교육 현실을 외면한 채 선행학습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교육청 방침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대치동의 한 국어전문 논술학원장은 "이 지역 아이들은 90% 이상 선행학습을 하는데, 어떻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냐"며 "현재의 평가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선행학습을 단속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의 한 학부모도 "특목고를 보내려면 초등학교 때 결정해야 한다는 주위 권유에 따라 이번 겨울방학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학원 특목고반에 보냈다"며 "시교육청 방침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학부모들의 조바심을 이해하면서도 선행학습은 학원의 상술과 학부모의 욕심이 빚어낸 측면이 크다고 지적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학생 244명을 조사한 결과, 선행학습 과외는 실제 학업성취도에서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모 사설학원의 안병철 부원장은 "총 10개반 중 4개반을 초등학생 선행학습 반으로 운영하고 있으나, 이 중 절반 이상은 학교 공부를 쫓아가기도 힘들어 원래 학년으로 내려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S중학교 김모(32) 수학 교사는 "연령에 맞지 않는 어려운 과정을 공부하다 보니 원리 이해에는 소홀하고, 답만 구하는 요령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며 "학원 수강을 하더라도 아이의 실력에 맞게 정상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반짝 효과뿐… 장기적 부작용 더 커"/교육개발원 김양분 위원

"선행학습으로 반짝 효과를 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학생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해 고2 학생 244명의 5년간(중1∼고2) 성적자료를 분석, 선행학습의 효과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던 한국교육개발원 김양분(사진) 연구위원은 "단기이든 장기이든 선행학습이 성적의 상승을 가져왔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선행학습의 효과가 나타나는 듯하지만, 입시 시기가 되면 모두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금세 변별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국어와 영어의 경우 선행집단과 비(非)선행집단의 성적 격차가 줄어들거나 오히려 역전되는 경향도 보였다는 설명이다.

김 위원은 "선행학습으로 학원에 오래 다니게 되면 혼자 공부하는 것을 어려워 하고, 심한 경우 학원중독 현상까지 보인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는 특히 "선행학습 학생들에 대한 심층면접 결과, 테크닉 위주의 학습으로 피상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고, 원리의 이해나 전체적인 맥락 파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불완전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고 선행학습의 폐해를 지적했다.

김 위원은 "남이 하니까 불안해서 내 애도 보내게 되는 식으로 선행학습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며 "사지선다형 문제를 빨리 풀어서 점수만 잘 받으면 되는 현행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학업성취 기준을 시급히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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