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2월11일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71세로 작고했다. 도미에는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는 기법을 즐겼던 탓에 오래도록 별볼일 없는 화가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바로 그 기법 덕분에 표현주의 조형예술의 선구자로, 풍자 만화의 아버지로 꼽힌다.도미에는 지중해 항구 도시 마르세유 출신이다. 유리 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정착한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발이 닳도록 드나들며 미적 감수성을 쌓았다. 그 가난한 소년이 자라서 그린 그림들 가운데 일부는 뒷날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오르세 미술관의 방 하나를 채웠다. 도미에는 스무 살 무렵 풍자 잡지 '실루에트'에 데생들을 발표하며 초창기 시사 만화가의 대열에 끼였고, 그 뒤 '카리카튀르' '샤리바리' 등의 시사 만화를 담당하면서 독자들만이 아니라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왕정복고, 7월혁명, 2월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적 사변들이 점점이 박힌 격동의 시공간이었다. 도미에는 당대 권력자들의 초상과 부르주아적 풍속을 비판적 화폭에 담음으로써 예술과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시대의 눈밝은 기록자가 되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정치권력자, 은행가, 법관 따위의 지배계급은 한 눈에도 탐욕과 술수로 배불러 있는 모습이다.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 왕을 익살맞게 그린 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도미에가 초석을 놓은 한 컷짜리 시사 만화를 한국에서는 흔히 '만평'이라고 부른다. 한국일보에도 매일 오피니언 면에 배계규 편집위원의 만평이 실린다. 만평은 선의 힘과 정치적 감수성이 어우러지는 장르다. 선의 힘을 가늠할 미적 안목이 모자란 기자는, 소박한 감식자로서, 적어도 정치적 감수성에서는 배 위원이 오노레 못지않다고 판단한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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