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이 뜻밖의 사고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점에 대해 한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주위에서 희망도 없이 꺼져가는 부모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가족을 종종 본다. 말기 암 환자든 식물인간이든 간에 기사회생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차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매달리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기사회생 확률이 30% 이상만 된다 해도 최선을 다해보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본다.
하지만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그 가능성이 너무도 미미하다면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 생명만 연장하는 식으로 가게 된다면 환자의 고통도 문제지만 살아 있는 가족들의 생계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를 위해 병원에 매달리다 보면 보호자는 지칠 대로 지치게 되고 과중한 병원비 때문에 심지어는 살던 집을 팔게 되고 셋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엔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안락사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본다. 비정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환자 본인과 그 가족을 위해서 병원측과 가족이 합의한다는 것을 전제로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사랑하는 딸의 산소마스크를 벗겨내 사망케 한 아버지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비정한 아버지, 살인자 아버지로 낙인 찍혀 구속수감되었다가 집행유예로 겨우 풀려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야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오죽 했으면 살아 숨쉬는 사랑하는 딸의 마스크를 벗겨냈겠는가? 그 딸은 여러 해 의식도 없이 그저 식물처럼 누워 숨만 쉬고 있었다. 10년 동안 딸에게 쏟은 정성은 다 허사가 되고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는 부채만 남았다. 그러니 그 아버지를 비정하다고만 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쪽이 옳을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이웃나라에도 없는 법을 만들어 눈총을 받을까 의식하지 말고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천양욱·서울 중구 을지로 6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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