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에 닿는 가장 큰 길이 국도 3호선이다. 헨리 키신저가 미 국무장관 시절 방한(1973년)해서 자기네 부대를 시찰한다는 바람에 군사정부가 허겁지겁 닦은 길이다. 이름하여 '평화로'다. 30년 전 일이다. '전국에서 가장 비까번쩍했다'던 그 도로는 이제 시골 군 단위 행정도로 축에나 간신히 끼일 형편이지만 이름은 여전히 평화로인데, 과연 그 명명(命名)의 염원처럼 평화의 길이었는지는 따로 따져 볼 일이고….아무튼 그 평화로가 자갈길이던 시절부터 옷 보따리 하나 달랑 끼고 여자들이 들어와 미군부대와 담을 사이에 두고 마을을 꾸렸다. 동두천 기지촌으로 불려온 3만5,000평의 '보산관광특구(97년 지정)'다. 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이 진주했고, 바로 기지촌이 형성됐으니 따지자면 올해는 한반도 기지촌 역사의 60갑자를 메우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동두천의 미 7사단(현 2사단·캠프 케이시) 주둔은 그보다는 모자란 52년부터지만 동두천이 어떤 곳인가. 한반도 최대의 미군 주둔지요, 파주 의정부를 잇는 한강 이북 GI벨트의 중심이 동두천이다. 해서, 평화로의 끝, 보산동 기지촌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미군 문화의 하이라이트였던 곳이다.
미군 부대의 한강 이남 이전 방침을 듣고 찾아온 데 따른 선입견 때문일까. 아니면 평일에다 추워진 날씨 탓일까. 온 종일 끄무레하던 하늘이 그예 눈발을 토해내던 4일 밤, 보산동 기지촌은 그 짙고 농염하던 이미지와는 달리 교교하고 처연해 보였다.
"나무 두어 그루만 심어두면 호랑이가 기어 나올 판이요." 보산동에서 30년 넘게 양복점을 하고 있다는 조용석(52)씨. 그는 한 벌에 90달러씩 받는 양복을 주문 받아본 게 언제인지 가뭇하다고 했다. "왕년에요? 직원 여남은 명씩 데리고 일하던 적도 있지요." 그 왕년이란 맞춤양복 한 벌에 50달러 하던 70년대의 흥성기를 이름인데, 80년대 들면서 시난고난 하면서도 고만고만하던 경기가 9·11테러 직후부터 급전직하했다는 게 그의 설명. 연이어 이라크전쟁이 터졌고, 북핵 등 안보 현안이 질기게 이어졌다. 최근까지 툭하면 미군 외출 규제고, 비상경계령에다 훈련까지 빈번해진 것이다.
인근의 한 외국인 전용 '댄스 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60평 남짓의 공간. "평일 매상은 평균 100달러도 어렵고, 금·토요일 주말에는 600∼700달러 정도 합니다." 러시아 여성 접대부 3명으로 장사하는 그 가게 카운터에 앉은 20대 남자 종업원은 "평일에는 하루 손님 숫자를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보증금 1억원에 200만원 월세가 버거워 세입자가 나앉는 바람에 지난해부터 건물 주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또 다른 홀도 오후 8시를 넘긴 그 때까지 마수걸이도 못하고 있었다. 접대부(열에 아홉은 동남아나 러시아 여성)를 많이 둔 집은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숙식 제공에 월 100만원(소개업소 몫 47만원)의 인건비가 부담스럽다. 개중에 매춘을 묵인하거나 주선하는 곳도 없잖아 있지만 이래 저래 장사를 못해먹을 판이니까 문닫을 각오로 그 '지랄들'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판국에 미군 당국은 종업원과 미군의 어떠한 신체접촉도 금한다는 내용을 담은 '건전 업소 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소식. 업주들은 12일께 미군 대표단과 협의인지 통고인지를 받게 돼 있었다. 관광특구 상가연합회 이명석 회장은 "이미 죽어있는 경기를 확인사살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업주들에게 미군 이전은 훗날 고민할 일이었다.
보산동 특구에는 술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발이며 옷, 이불 등 여느 동네에나 있는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모여 250여 점포로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의 중추는 단연 술집이다. 대체로 거기서 풀린 달러가 특구로 퍼져나가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인 전용홀 48곳 가운데 5곳이 최근 몇 달 새 폐업했고, 문 닫는 업소는 갈수록 늘어날 판이라고 했다. "다른 가게들도 대안이 없어 문을 열고 있는 형국입니다." 업주 대개가 보산동 30∼40년 터주들이고 보면 혹시 60, 70년대 노다지 호황의 그 때에 비해 어렵다는 것은 아닐까. "올해 내가 예순여섯이요. 이 나이에 지난해 전립선암 수술까지 받은 몸뚱아리로 홀 청소하고 DJ한다고 앉은 거 보면 모르겠소." 그는 대답조차 귀찮은 듯 했다.
평택이든 어디든 미군부대 따라 가려도, 믿거나 말거나, 돈이 없다는 게 그들의 말. "땅값, 집값이 5배, 10배 차이가 나는데 엄두가 납니까. 또 거기는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이 없소?" 그러나 상인들은 미군부대 이전을 아직은 '설마, 그럴리야' 쯤으로 이해하는 눈치였다.
70년대 언젠가도 미군부대가 죄다 철수한 때가 있었단다. 훈련 나가는 줄 알고 손 흔들어 보냈는데 다음 날 부대가 텅 비었더라는 것. 서둘러 가게 팔고 떠난 이도 있었고, 목을 매단 이도 있었다고 했다. 그랬는데 한달쯤 뒤에 부대가 돌아왔는데 알고 봤더니 7사단이 떠나고 2사단이 주둔한, 부대 재배치더라는 것. 70년대 말 지미 카터 시절에도 미군 철수 얘기가 있었지만 미군도, 기지촌도 건재했다. "미군들은 떠날 때는 말 없이 떠나요. 이렇게 떠들어대면 절대로 안 떠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으나 사나 보산동'이라고 했다. 뜰 사람은 다 뜨고, 돈 없이 나이만 채운 이들만 남았다는 것도 그들의 푸념이다.
미군부대 PX에서 흘러나온 깡통 맥주며 양담배, 시바스리갈에 세븐세븐 양주를 들고, 여자들이 맨 몸뚱이 하나를 밑천 삼아 일군 곳이 보산동이다. 생존의 요구는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견딜 수 없는 일들도 견디게 만드는 법. 하물며 인권이라는 단어가 교과서에 조차 등장하지 않던 때 아니던가. 극단적인 마초의 공간에서 살색 다른 이들 틈에 끼어, SOFA라는 제도적 질곡과 사회적·인종적 멸시 속에 내던져지다시피 했던 여자들이 견뎠을 그 패악의 세월을 새삼 들먹일 계제는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버텼고, 남자들이 베트남전 피의 값으로 달러를 번 것처럼, 이 땅의 가장 낮고 음습한 곳에서 살을 팔아 조국 근대화에 힘을 보탰다. 그 돈이 많든 적든, 그 행위가 옳든 그르든 이는 엄연한 사실인 바, 61년 관광사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면세 맥주를 공급받는 특수 관광시설업체로 공식화한 '미군 전용홀'은 64년 973만3,000달러의 외화를 벌었다(한국관광 50년 비사). 그 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은 1억달러 언저리였다. 그 선두에 섰던 곳이 이 곳, 보산동 기지촌이다.
한 때 구세군으로 쳐주던 미군이지만 세월이 변해 혹자는 필요악으로, 심지어 절대악으로 치부하는 이들까지 생겨난 세상이 됐다. 그들을 상대했던 기지촌 여자들의 자리는 대부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입국한 동남아나 러시아 여성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반미가 왜 문제인가'라는 책을 쓴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미군이 존재하는 한 기지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하지만 달라진 정치·안보의 지평과 변화한 시대요구 앞에 기지촌의 의미와 위상 역시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지 않은 듯 변했고, 국적 불명의 풍경 속 보산동 기지촌은 그 변곡점의 꼭대기에 서서 목을 길게 빼 걸고 있었다.
/동두천=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미군부대 경제효과 동두천 GDP의 20%
동두천시에는 캠프 케이시 외에도 '턱거리'로 불리는 광암동의 캠프 호비 등 크고 작은 5개 부대와 짐볼 훈련장이 있다. 전체 시 면적의 42%인 40.5㎢(1,226만평)가 미군 공여지. 1만7,850명(지난해 말 추산)의 미군 및 군속(2,850명)이 머물며 시 연간 총생산(GDP)의 약 20%인 1,400억원 대의 GI경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약 3,600세대 1만5,000여명의 시민(시 인구의 21%)이 생계를 달고 산다. 당연히 번듯한 제조업도 없고, 경제활동의 73%가 영세 서비스산업과 관련돼 있다. 잦은 미군 범죄며 소음·수질 오염 등 온갖 직·간접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미군 재배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대구 동구 등 15개 미군 공여지 지자체장 협의회를 구성, 미군 재배치에 따른 특별법 등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군이 공여지를 훈련장 등 명목으로 존속시킨 채 떠나는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확정된 게 전혀 없어 사후 대책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구상도 못 내놓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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