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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알코올 중독서 斷酒 전도사로 이동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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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알코올 중독서 斷酒 전도사로 이동포씨

입력
2004.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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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불황에도 소주 소비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남자 넷 중 하나는 알코올중독 전단계인 알코올의존 단계다.' 술 관련 소식이 부쩍 잦아졌다. '알코올중독 부인이 한집에서 죽은 남편을 엿새동안 모르고 방치했다' '실직한 50대 알코올중독 홀아비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등 …. 술에 심신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들이야 다 있을 터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어지럽고 답답한 세상에서야. 그러나 절망에서의 도피는 또 다른 절망의 핑계가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뿐이려니.이동포(李東鋪·50)씨는 그렇게 절망의 극한까지 가 본 사람이다. 반생(半生)을 술에 절어 폐인으로 살았다. 스스로를 그렇게 버렸으니 세상인들 버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도 같은 싸움을 통해 그 무서운 알코올중독을 벗어났다. 지금은 작으나마 성공한 사업가에 스포츠맨으로, 단주(斷酒) 전도사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얘기를 전한다. 절망하고 있거나, 그래서 부질없는 도피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이동포씨는 열일곱 어린 나이부터 술을 입에 댔다. 술꾼들이 다 그렇듯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가난, 그래서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가수의 꿈(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국신인발굴대회에서 입상한 실력이다)…. 스물 무렵 충북의 탄광 막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술꾼이 됐다. "어린 친구가 술 세네. 대단해." 우쭐함에 주량은 무한정 늘어났다. 앉은 자리에서 2홉들이 소주 10병은 마셔야 성이 찰 정도가 됐다. "회식 때면 첫 잔을 못 기다려 주방에서 먼저 소주 2병을 들이붓고 나서야 자리에 들어가고, 파할 땐 남들이 남겨놓은 잔술까지 돌아가며 싹 비워야 일어서곤 했지요."

크고 작은 술 사고가 문제 돼 강원 삼척의 탄광으로 옮겨갔다. 승진해 관리직원이 됐지만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몸담아온 탄광촌을 떠나 93년 고향 근처 충주로 이사했다. 새로운 인생설계에 부풀었던 그 때 큰 사고를 당했다. 타고있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11톤 트럭이 덮쳤다. 생명은 건졌으나 두주 만에 의식을 회복한 든 그에게 우울증(교통사고의 흔한 후유증이다)이 찾아 들었다. "모든 꿈이 일시에 무너져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빛조차 싫어 그저 어두운 방안 한 구석에 처 박혀있기만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술이 유일한 도피처가 됐다. 소주를 컵으로 들이키고 쓰러졌다가 정신 들면 또 마시고 쓰러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물도 못 넘기는 목구멍이 신기하게 술만은 받아주었다. 그래도 워낙 천성이 부지런한지라 자동차 정비기술 등을 배워 일을 나갔지만 번번이 오래 가지 못했다. "술 취해 펑크 난 바퀴를 때운 뒤 나사도 조이지 않은 채 내보내질 않나, 엔진오일을 갈고는 마개를 막지 않아 항의를 받질 않나…."

화분, 책상서랍 뒷공간 등 집안 곳곳에 술을 숨겨놓고 꺼내 마셨다. 술 살 돈이 떨어지면 휘청휘청 팬티바람으로 아내가 일하는 미장원을 찾아갔다. 손님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까내리며 아내를 협박, 돈을 타냈다. 술을 사 들면 집까지 걷는 5분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바로 길에 주질러 앉아 병나발을 불다 널부러졌다. 집은 엉망이 됐다. 툭하면 때려부숴 세간이 남아나질 않았고, 술 취해 내지른 똥 오줌이 사방에 널렸다. 아내와 두 남매에게도 걸핏하면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갔다.

교통사고 통원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95년 여름 이씨를 원주의 전문병원에 보냈다. 거기서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원래 술꾼들은 제 증상의 심각성을 인정 못하는 법이다). 치료책자를 받아와서는 머리맡에 두고 술 생각이 날 때마다 펼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은 그렇게 간단하게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머리맡의 책이 슬그머니 책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책꽂이에 깊숙이 꽂혔다. 이듬해 봄 일 나가던 공사장 인부끼리의 회식에서 누군가 막걸리를 한사코 권했다. '겨우 막걸리 한잔인데 뭐' 망설이다 쭉 들이킨 그걸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흘간 술로 곤드레된 그를 이번엔 아내가 연락해 경기 안양의 정신병원에서 묶어 데려갔다. 이름을 잃고 '충주2' 호칭으로 100일간 치료를 받았다. 치료란 중독자임을 끊임없이 각인시키면서 견디도록 하는 것 뿐이었다. "알코올중독자의 음주충동이 어느 정도인지 압니까? 한 여름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 골인점에 들어갔는데 물이 없다고 해봅시다. 그 때 미칠 것 같이 물을 찾는 심정을 상상해보세요." 병원을 나서는대로 실행할 자살계획을 세워두었다. 어차피 술 끊는 건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예전 이 병원에 있었다는 이가 찾아왔다. "오늘이 금주 10년째 되는 날입니다." 놀라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루부터 시작했을 뿐입니다." 문득 깨달았다. '그래, 하루가 모여 10년도 되는구나. 그럼 한 2년만 해보자, 안되면 그때 죽자.' 집으로 돌아와 죽음의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순전히 참느라고 단 하루에 몸무게가 5㎏이나 내린 날도 있었다. 누가 술을 권하면 '입술에 살짝 발라만 볼까?' 덜컥 겁이 나 30여리를 죽자고 뛰어 달아난 적도 있었다. 너무도 견디기 힘들 때는 무턱대고 인근 교회를 찾아갔다. 기도실에서 혼자 몇 시간을 울고 웃고 몸부림쳤다. "씨X, 시험도 어느 정도여야 하지 않느냐. 정말 신이 있다면 제발 이 고통 좀 어떻게 해달라"고 악을 썼다. 그렇게 약속한 2년을 넘겼다. 술자리도 피하지 않을만큼 자신감이 붙었다. "제게 권하지만 마세요." 하지만 도에 넘게 짓궂은 이는 꼭 있는 법. 한번은 집요한 강권에 4홉들이 소주병을 집어 들고는 입 대신 제 머리에 들이부었다.

그래도 주변은 물론, 가족조차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기야 너무도 오랫동안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였으니까.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시작한 게 보디빌딩이었다. "보디빌딩은 금주노력과 비슷한 데가 있어요. 고통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 죽을 힘을 다해 한번 더 들어올리는 거지요. 참고 또 참는 겁니다." 간간이 떠오르는 술의 유혹을 잊기 위해서도 하루 10시간씩 운동에 매달렸다. 집에는 자정을 넘겨 엉금엉금 기다시피 돌아갔다. 초인적인 노력은 단 5개월 만에 수십년 술에 찌든 그의 몸을 '미스터충주 장년부 1위'의 신체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어 지난해 서울YMCA가 주최한 전국대회에서 3위에 오르기까지 무려 18번의 입상기록을 이루어냈다.

IMF 직후 폭락한 주택을 경매에서 사들여 임대를 놓는 사업도 궤도에 올라 처음으로 생활도 안정을 찾았다. 이젠 아무도 '또라이' '폐인'으로 불리던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난달 이씨는 신장질환으로 사경을 헤매던 처이모에게 선뜻 신장을 이식해주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삶에 대한 절박한 욕망은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모릅니다. 그걸 아는 제가 모른 체할 수 없었지요." 어쩌면 남편보다 더 혹독한 세월을 견뎌야 했던 아내도 비로소 그의 재생을 인정해 주었다.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게 진 빚은 평생 다 못 갚을 겁니다. 딸아이가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때 일기장에 '아버지 없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라고 썼겠습니까. 술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있을 때마다 아들이 엄마 연락을 받고 학교를 조퇴해 울며 저를 집으로 업어가곤 했어요. 그런데도 비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커준 게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지요.(아들은 군 복무 중이고 딸은 대학생이다)"

이동포씨는 매주 시보건소와 병원 등지에 나가 과거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고있는 알코올중독자들의 재기를 돕고 있다. 더 충실한 도움을 위해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심리상담사 과정도 공부했다. "지금도 술 생각이 전혀 안 나진 않지요. 여전히 우울증 약도 먹고 있습니다. 일단 알코올에 중독되면 완치란 없습니다. 삶에 대한 책임감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참고 견딜 뿐이지요."

이젠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그에게 감추고 싶을 지난 날을 거리낌없이 털어놓는 이유를 물었다.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고 싶어섭니다. 저 같이 갈 데까지 다 가본 사람도 해냈지 않습니까."

그래, 피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삶에서 뭐가 있으랴. 이씨는 기사에 '충주시보건소 정신보건상담실'을 꼭 명기해 달라고 했다. 그곳 전화번호는 (043)850-6675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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