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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광폭의 시대"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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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광폭의 시대" 벗어나기

입력
2004.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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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충북 옥천에서 사라진 청년 7명이 실미도 희생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가족들의 주장이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실미도 현상' 정도로 생각했다. 영화 '실미도'가 바람을 일으키다 보니 혹시 하고 기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7명 중 5명의 이름이 실미도 관련 부대원 이름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684부대'의 실체를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는 1968년 4월1일 북파 특수임무 요원 양성 목적으로 31명을 모집했으며, 그 중 7명은 교육 중에 죽고, 20명은 난동과정에서 죽고, 살아남은 4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사형이 집행됐으나 유해 처리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혔다.

국방부 입에서 그 사실을 들으면서 새삼 몸서리를 치게 된다. 일제시대도 아니고, 6·25 동란 중도 아니고, 불과 36년 전에 일어난 일이 그렇게 깊이 묻혀져 있었다니 우리가 얼마나 광폭한 시대를 살아왔는지 실감이 난다.

광폭의 시대란 말이 실감나는 것은 실미도 사건만이 아니다. 신문을 읽고 TV뉴스를 볼 때마다 이 나라의 불행을 한탄하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부패, 불법, 폭력 사건이 사라질 날은 언제인가. 거짓말, 후안무치, 저능(低能)의 꼼수가 사라질 날은 또 언제인가. 온 나라에 가득찬 악취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이미 존경의 대상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 이제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의 위신은 끝없이 추락하고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조롱은 섬뜩할 만큼 거칠어지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불리던 강삼재 의원은 지난 주 '안풍 사건' 재판에서 안기부 돈으로 알려진 문제의 940억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려 했으나 국민과 역사를 배신할 수 없어 늦게나마 진실을 밝힌다"고 말했다.

취임 직후 "한 푼도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위선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각 TV들은 강 의원의 폭탄선언을 보도할 때마다 김영삼 대통령이 "한푼도 안받겠다"고 선언하던 장면을 방영하고 있다.

강 의원의 폭탄선언이 진실이든 아니든 김영삼 대통령과 940억이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돈이 대선을 치르고 남은 돈이든 안기부 예산이든 간에 김영삼 대통령은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대선 잔금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었거나, 안기부 돈을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었다면 굳이 기업에 손 내밀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비꼬는 사람들이 많다. 또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여당 사무총장에게 천억에 가까운 선거자금을 넘겨주는 장면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라고 한탄하는 소리도 나온다.

"내가 가진 현금은 26만원뿐"이라고 주장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이 200억원 대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구형의 낡은 승용차와 모자로 위장한 채 검찰청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이 시대의 몰염치에 전율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광폭한 시대를 청산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그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을 누를 수 없다. 그는 광폭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숭고한 시대적 의미를 거친 언동으로 격하시키고, 자주 비상수단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노사모의 한 리더는 "악랄하게 전진하자"는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상징적인 표현이었다고 해도 '악랄하게' 악랄한 시대를 끝낼 수는 없다. 그것은 악순환일 뿐이다. 티코니 10분의 1이니 하는 주장 역시 청산돼야 할 사고방식이다.

36년 전 암울한 역사 속에 행방불명된 젊은이들의 존재를 국방부가 인정하게 만든 것은 영화 '실미도'의 힘이다. 총칼을 이겨내는 예술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문화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힘으로, 양식과 합의와 질서의 힘으로 이 광폭의 시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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