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81년 가을엔 전국의 대리점만 100개가 넘었다.나는 경영학이나 마케팅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기업은 예술'이라 믿고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며 살아왔다. 기업인은 일자리 창출과 함께 회사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창조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영학은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일본 마쓰시타그룹 창업주의 말도 가슴에 새겼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강의실에서는 새롭게 물결 치는 경영의 실체를 터득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사업은 학교 시험처럼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알로에 붐과 더불어 나는 '방송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TV와 라디오에 자주 나갔다. 내가 출연할 때면 진행자들은 "알로에하면 김정문, 김정문하면 알로에"라고 서두를 꺼낸 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이름 김정문"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내 명성이 쌓이면서 사업도 번영을 구가했다. 연일 신문 방송이 알로에 효능을 보도한 덕분에 따로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내게 알로에 사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었다. 사업은 짧은 시간에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그러나 거의 내 혼자 힘으로 일으킨 이 땅의 알로에 붐은 81년 겨울을 고비로 짙은 암운을 드리웠다. 알로에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알려지면서 수입업자와 국내 재배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당연히 과잉 수입과 재배에 따른 가격 덤핑이 도를 더해갔다. 제살깎기 식 경쟁에 그나마 순수한 마음을 지닌 알로에 사업자들도 줄줄이 파산했다. 악덕 업자는 괘씸했지만 나를 보고 뛰어든 사람들에겐 미안했다. 또 불량품이 나돌아 알로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모습에는 억장이 무너졌다. 사업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깨지는 듯한 아픔도 겪었다.
모든 산업기술과 예술활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듯 기업도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우리 회사(김정문알로에) 사시(社是)를 '진실'로 정한 데는 양심적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알로에 베라겔'을 미국에서 직수입했다며 판매하는 업자들이 넘쳐 났다. 이들은 100% 순수한 겔이라고 선전했지만 70% 이상의 물에 '아리시모스'란 해조류를 섞어 만든 가짜가 대부분이었다. 또 항암 작용이 있는 '알로에 미친'과 위·십이지장 궤양에 효능이 뛰어난 '알로에 울신'같은 성분은 생 잎에 4만분의 1정도 함유돼 있어 함량 분석 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알로에 원액 100%, 또는 몇 분의 1로 농축했다는 제품이 쏟아졌다.
82년 봄부터 신생 업자들은 우리 회사 대리점을 타깃 삼아 판매망 확산에 나섰다. 그들은 가짜 또는 저질의 제품을 값싸게 공급했다. 일부 대리점도 눈앞의 이익을 좇아 우리 회사 간판을 내건 채 엉터리 제품을 취급했다. 심지어 내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대리점 주인 중에도 직접 알로에를 수입해 뒷거래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백명이 동시에 날뛰는 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 당 3만원을 호가하던 베라겔은 2,000원까지 폭락했고 재고가 농장을 메워갔다. 82년 가을에는 전국의 대리점들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 우리 회사는 물론 알로에 시장이 이 땅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알로에 제품 범람을 못마땅하게 여긴 정부 당국도 약사법 위반과 과대광고란 죄목으로 업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알로에 시장은 더욱 급속히 위축됐고 나 또한 이미 파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였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사업가는 망하면 인간도 아니다"는 말이 나를 옥죄었다. 짧은 행복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렇게 무너질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기울어 지는 사세를 바로 잡기 위해 고리채에 빠져들고 말았다. 82년 겨울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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