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38)은 참 복 없는 작가다. '내가 사는 이유' '거짓말'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등 내놓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았지만, '화려한 시절'을 빼면 시청률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다. '허준'과 맞붙은 '바보 같은 사랑'은 1%가 나온 적도 있다. KBS2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도 그렇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맛깔스럽게 풀어낸 수작이건만, 꽃미남·꽃미녀의 천국행 열차('천국의 계단')에 치이고,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맞바람('천생연분')에 밀려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일상의 비린내가 물씬한 에피소드, 독기 없이도 가슴을 찌르는 대사에 '꽃아름 중독자'들은 상찬을 쏟아낸다. 그럴 때 그는 참 복 많은 작가다.거짓말
"시청률 욕심 없다면 거짓말이죠." 본래 깡마른 그는 그새 더 축났다. 몸무게가 평소보다 3㎏이나 빠진지 오래다. "심하게 앓았어요. 드라마 주시청자 층인 30, 40대 여성들의 얘기라 내심 기대가 컸지요. 도대체 뭘 잘못했나, 반성이 자책이 되고, 자책이 자학이 되고…." 그는 "다 뒤집어? 고두심 선생님 한 번 벗겨봐? 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했다"면서 "방송 전에 절반 이상을 미리 써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이러다 밥 못먹고 살지, 싶을 만큼 호되게 앓은 뒤에야 냉정을 찾았다. "시청률 좀 올려보자고 괜한 짓 했다가 작품 망치기 십상이죠. 힘들어도, 처음 정한 길을 뚜벅뚜벅 가는 수밖에."
바보 같은 사랑
"아버지 얼굴 처음 본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딸 같은 여자와 딴 살림 차린 주제에 순둥이 조강지처에게 "집안 꼴 잘 돼간다. 큰 딸년은 이혼하고, 둘째 딸년은 천하에 저밖에 모르게 키우고, 아들놈은 주먹질이나 해서 감방 들락거리고, 에미가 돼가지고 밥만 잘하면 뭐해"라고 타박하는 두칠(주현)만큼 뻔뻔하진 못했어도, 아버지의 대책 없는 바람은 어린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옥(배종옥)처럼 아버지를 철저히 무시했고, 미수(한고은)처럼 돈 몇 푼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하던 때도 있었다.
"곰살맞은 아내를 못 만난 아버지도 안된 분이죠." 증오의 끝에서 만난 연민을 그는 "니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애교를 떨었으면, 미쳤다고 내가 나가서 사느냐"는 두칠의 항변에 담아냈다. 가부장제의 횡포에 면죄부를 준 건 아닐까. 작가는 "남자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며 "경계를 허물고, 상처의 악순환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이 작품의 주제예요. 미련스럽게 사랑만 쏟다 떠난 울 엄마, 그리고 영자(고두심)도 그래서 행복했을 거라 믿어요."
내가 사는 이유
"시청률 공식? 저도 알죠." 방송 물 먹은지 올해로 10년, 그도 바보는 아니다. 선악 대비 확실히 하고, 갈등 구조는 꼴수록 좋고, 선남선녀 앞세워 판타지도 자극하고….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제 길을 걸어왔다. "글 쓰면서 행복하고 싶은 게 내가 사는 이유인데, 그렇게 쓰면 안 행복할 게 뻔한데, 그럴 수야 없죠. 차라리 좀 적게 먹고 살죠."
미수가 유부남 인철(김명민)을, 그것도 오빠 죽인 원수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시청률 의식한 장치가 아닌가, 딴지를 걸어봤다. "맞아요. 좀 작위적이죠? 멜로와 생활을 넘나들어 보고 싶었는데, 그 방면엔 영 재주가 없네요. 둘의 사랑을 어떻게 풀지가 가장 큰 숙제예요."
화려한 시절
"어머니, 아버지랑 시시콜콜 얘기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드라마의 매력이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문학도였던 그는 봉제공장 시다, 포장마차 주인, 출판사 직원을 거쳐 1995년 MBC 베스트극장 '세리와 수지'로 데뷔했다. '컬트 드라마'의 효시로 꼽히는 '내가 사는 이유'(1997) '거짓말'(1998)로 일찌감치 인기작가 군에 이름을 올렸다.
"방송 참 별거 아니네, 하며 우쭐했죠. 나문희, 김영옥, 윤여정 선생님 등과의 만남을 통해 '이 바닥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라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건방만 떨다 사라졌을 거예요. 이 분들이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그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묻히는 시대일수록 작가는 그런 아름다움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의 우직함에 시청률도 화답하는 '화려한 시절'이 올까. 그렇게 믿고 싶다.
/이희정기자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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