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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4.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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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경구 중에 한 때 유행했던 말이 '아는만큼 보인다'는 거였죠. 특히 문화유적 답사 때는 이 말을 수차례 되새겨야 합니다. 석탑의 외관이 밋밋하다고 "뭐, 별 것도 아니네"고 말했다간 무식을 자백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죠.그래서 설령 속으론 심드렁하더라도, 얼굴은 자못 심각하고 때로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야 합니다. 사실 유적에 얽힌 전설과 역사, 예술적 가치를 공부하지 않고 가면 뭔가 하나를 빠뜨린 듯 제대로 여행을 한 것 같지도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아는 것'이라는 게 바뀌고 있습니다. 역사책보다 드라마나 영화, CF를 더 많이 접하고 익혀야한다는 것이죠. 이 곳은 OO드라마의 누구와 누구가 키스했던 곳이고, 이 곳은 둘이 처음 만났던 곳이고…. 요즘 여행지를 가면 역사 보다는 이런 얘기를 더 자주 듣게 됩니다. 인기 여행지가 문화 유적 중심에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 중심으로 넘어갔기 때문이겠죠. 유적에 깃든 전설을, 드라마나 영화 속 스토리가 대신하는 격입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유적지가 된 것처럼요.

까닭에 드라마 속 장면을 모르고 가면 여행지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는, 역사를 제대로 몰라 당황했던 옛 시절의 스트레스가 다시 떠오르더군요. 보성차밭도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저는 보성차밭이 등장한 영화나 드라마, CF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뭔가를 빠뜨린 게 아닌가 싶어 마음 한 구석이 걸리더군요.

하지만 여행지가 꼭 이렇게 역사나 영상문화의 뒤만 좇아야 하는 걸까, 그 자체로 즐기는 곳이 될 순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여행지의 풍경이 역사의 종속변수에 불과하기때문에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목적 없이, 뭔가를 꼭 찾겠다는 집착없이 여행지의 풍경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세상은 더 이상 아닙니다. 이유는 둘 중 하나겠죠. 첫째는 볼 거리가 없는 여행지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상술일테고, 두번째는 자연의 풍경 그 자체를 우리 스스로 보고 즐길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연과 대화하고 교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듯이.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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