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도 훌쩍 반이 지나버린 지금까지 "방학인데 이게 뭐야…"는 아이들의 원성을 듣는다면 이젠 나른함과 움츠림을 떨쳐내고 과감하게 길을 나서자. 교육적이면서 적당한 휴식과 볼거리, 그리고 겨울 자연의 풍광이 함께 어울리는 곳, 저기 남도로 눈을 돌려보자.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장이다. 인근의 보성 차밭·해수녹차탕을 함께 둘러보면 겨울방학 가족나들이로서 안성맞춤이다. 추위도 한풀 꺾여 겨울 햇살이 싱그럽다.
초가집의 황토미
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을 나와 벌교 방향으로 10여분 달렸을까. 굽이치는 고개를 막 넘어서자 입이 딱 벌어졌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펼쳐진 광활한 벌판 때문만은 아니다. 밀집모자들이 도열한 듯 누런 황토빛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다. 어쩜 이렇게 아담하고 아름다울 수가. 속엣말이 절로 새 나왔다.
초가집이 아름답다니…. 누추하고 볼품없다고 이미 30년전에 깡그리 없어졌던, 그래서 이젠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회색빛 시멘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은은함과, 포근함이 듬뿍 배어있다. 황토로 지어진 초가집들은 바로 땅에서 나고, 땅으로 사라질 우리의 심성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임머신 속 역사 나들이
순천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한국판 폼페이라고 할만하다. 연대기적 의미는 폼페이에 못 미칠지라도 이곳 역시 도시 하나가 통째로 시대를 뛰어넘어 생존한 곳이다. 500여년의 세월을 슬쩍 비껴가며 조선시대 한 군(郡)의 모습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 있다.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황토벽의 초가집, 고샅길 느티나무, 사또의 호령이 금방이라도 들릴 듯한 동헌….
옛 도시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이나 한국민속촌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전시용 복사판이 아니다. 낙안읍성은 삼한시대 마한 땅으로, 백제 때 파지성, 고려 때 낙안군 고을터였다가 조선시대 때 석성이 축조돼 남도 지역 군사·행정의 요충지였던 곳. 인조 4년(1626년)때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해와 중수한 장방형의 성곽은 총길이 1,410m로 100여채의 초가집을 포함, 4만1,000여평에 달하는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따지면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마을로 지금도 90여세대가 산다.
동네를 돌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간 느낌이 절로 든다. 성내 북쪽 중앙에 동헌을 중심으로 고을 수령의 숙소인 내아, 외부 손님을 맞던 객사, 향교 등이 자리잡았고 마을 곳곳으로 대장간, 장터, 서당, 우물터, 장독대, 물레방앗간 등이 조선시대 민초들의 삶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가옥과 건물은 새로 수리·보수되거나 복원된 것이지만, 마을 기본 얼개는 원형 그대로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낙안읍성을 우리 전통 도시 계획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꼽는다. 두말 할 필요없이 아이들에겐 더 없이 좋은, 살아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마을에서는 또 도자기 공예, 짚풀 공예의 시연 장면도 볼 수 있다. 5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온 만큼 사극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도 안성맞춤. '상도', '허준', '용의 눈물' 등에 이어 지금은 MBC 수목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도 활용되고 있다.
마을이 놓인 자리부터 신기(神氣)가 감돈다. 북쪽으로 금전산이 우뚝 솟았고 동서로 제석산과 금화산이 호위하며, 멀리 남쪽으로 부용산이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 전쟁터에 나갈 장군의 마지막 밤을 위해 장군의 부인인 옥녀가 머리를 풀고 머리 단장을 하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주변 산들이 머리카락을 산발한 듯 몇겹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방어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라는 은유이기도 하다.
낙안읍성이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물결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이 너무 쇠락했기 때문이었다. 낙안은 조선시대 군 소재지였지만, 입바른 지식인들을 꺼려했던 일제가 폐군조치하면서 점차 쇠퇴해갔다. 새마을 운동 때는 황토벽 초가집들이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워낙 낡아 그대로 보존되게 됐다. 그러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낙안읍성이 재발견됐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줄만한 우리의 전통 마을로 꼽혔던 것. 읍성내 마을 전체가 1983년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동헌 등 마을 곳곳의 건물들이 원형대로 복원됐다.
/낙안읍성=글·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낙안읍성에서 1박을 한 뒤 보성차밭과 율포해수욕장을 찾아가면 겨울철 가족여행으로 더할 나위없는 코스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지나 가다 승주 IC에서 빠져나온다. 857번 지방도를 타고 벌교방향으로 가면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나온다. 낙안읍성에서 보성으로 가려면, 857번 지방도를 타고 벌교읍으로 간 뒤 2번국도를 타고 보성읍으로 향한다. 보성읍에서 국도 18번을 타고 율포방향으로 가면 대한다업 보성다원이 나온다. 구경한 뒤 다시 18번 국도를 타고 계속 내려오면 율포해수욕장이다.
낙안읍성내 초가집 14군데서 민박을 한다. 다소 불편한 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황토방에서 묵는 멋이 남다르다. 방 한 칸 1박에 2만5,000원. 낙안읍성 관리사무소 (061-749-3347, www.nagan.or.kr).
대한다원 관광농원(061-852-2593,www.daehantea.co.kr)의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머물려면 율포해변에 묵으면 된다. 로마모텔(061-852-9486), 옥섬비치모텔(061-853-2240) 등이 있고, 민박은 회천면사무소(061-852-8301)로 문의.
보성군 낙안읍성내에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민속음식점이 4곳 있다. 보리밥, 팥죽, 빈대떡, 동동주 등 민속음식이 나온다. 금전산의 석이버섯과 고사리, 미나리, 더덕, 녹두묵에 매운탕이 오르는 팔진미 정식도 맛볼 수 있다.
■보성차밭·해수녹차탕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역사와 만난후, 인근으로 눈을 돌리면 가족 휴양의 여유가 기다리고 있다. 보성차밭과 해수녹차탕이다. 읍성을 나와 벌교를 지나 보성으로 향한다.
보성차밭 보성읍내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율포 해변으로 가는 고갯길. 산 능선 전체가 차밭으로 가꿔져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 바로 보성차밭이다. 최근 몇 년 사이 KBS드라마 '여름향기' 등 드라마, 영화, CF의 촬영지로 활용되면서 폭발적으로 알려져 차밭이라기보다 관광지로 더 성가를 날리고 있다. 연간 관광객이 100여만명. 차밭 중 특히 대한다업의 농원이 삼나무길과 어울려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농원에는 겨울철 평일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농원 입구, 하늘로 치솟으며 도열한 삼나무 숲길도 이국적인 색채를 풍기며 무척 인상적이다. 하지만 보석은 좀 더 안쪽에 있다. 삼나무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올라가면 말 그대로 비경이다. 활성산 자락에 무려 30만평에 이르는 차밭이 펼쳐져 있다. 능선을 따라 차나무가 줄을 지어 선 차밭은 거대한 기하학적 예술품의 전시장 같다.
겨울철에도 차밭은 초록빛으로 푸르다. 차잎은 사시사철 초록색으로, 겨울철에는 더욱 짙은 색채를 풍긴다. 또다른 멋이다. 그늘 진 곳에는 최근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아 있었다. 눈이 쌓였을 때 왔더라면 더욱 멋진 광경이었을텐데…. 아쉬움이 터졌다.
보성 차밭은 최근에야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은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차나무가 자생하는 곳으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물빠짐이 좋은 토양에 큰 일교차, 적당한 습기 등 차 생산에 적당한 환경이기 때문. 1939년부터 인공적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해 한때는 지금의 두배 가까이 됐지만, 차 경기가 부진하면서 줄어들었다. 물론 차 구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 맛도 음미하고 녹차아이스크림, 아이스녹차라떼 등 차로 만든 다양한 식음료를 맛보는 재미도 색다르다.
해수녹차탕 다원을 나온 뒤 율포 해변으로 내려가면 남도의 겨울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폭 60m, 길이 1.2㎞에 이르는 율포해수욕장이다. 서해와 동해의 겨울바다가 쓸쓸하다면, 남해의 겨울바다는 포근한 빛이 감돈다. 겨울 햇살이 마냥 싱그럽게 다가오고, 맑은 득량만 앞바다는 푸릇푸릇한 내음을 내품는다.
이곳의 명물은 해수녹차탕. 지하 120m에서 퍼올린 암반 해수에다 보성군의 자랑인 녹차를 넣고 만든 탕이다. 검붉은 색을 띄는 해수녹차탕은 피부를 통해 녹차성분이 흡수돼 피부탄력을 유지하고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인기가 높다. 특히 탕에 들어앉아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매력적이다. 득량만 바다가 아련하게 펼쳐진다.
98년 문을 열어 보성군 직영으로 운영되는 이 곳은 지난해만 34만명이 찾아와 지역경제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연중 무휴로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열고, 이용료는 어른 5,000원, 어린이 3,000원이며 20인이상 단체에게는 20% 할인된다. (061)853-4566
/보성=글·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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