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났다. 엔도르핀이 팍팍 돌았다. 매스컴 덕에 알로에는 전국적 붐을 일으켰다. 난치병을 고쳤다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알로에 사업은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라는 믿음은 신앙처럼 굳어졌다.나는 알로에 사업을 인류를 위한 복음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목사가 되고자 신학교에 입학했다 중도에 포기한 나였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든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농장에는 알로에를 재배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에서 올라와 부평의 농장을 찾느라 종일 헤맸다는 이도 있었다.
방송도 꾸준히 출연했다. 1980년 말 나는 한 TV에 나가 "알로에 효능은 20∼30년 사이 전세계 학계에서 규명됐다. 매스컴은 국민에게 최선의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일반 국민들의 건강에도 유익한 알로에를 알리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스스로는 알로에의 진가를 알릴 때까지 쓰러져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고 다짐했다.
당시엔 매스컴이 요란하게 알로에를 다뤘다. TV와 라디오, 신문에 단골 메뉴로 올랐고 여성 잡지들도 경쟁적으로 특집기사를 실었다. 덕분에 인구 3만∼4만 명 정도의 지방 소도시에서도 알로에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4,500만 국민에게 알로에를 알릴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 나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알로에 붐에 감읍했다. 그러나 돈벌이에 혈안이 된 업자들이 난립, 유통 질서를 파괴시켜 결국 우리 회사도 도산하는 등 알로에 붐의 대가는 혹독했다.
알로에 사업이 뿌리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곡절을 겪었다.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수년간의 배회와 좌절, 알로에 재배에의 희망이 뒤엉킨 세월은 고단했다. 78년 봄 친구 이연호(96년 작고·남양알로에 창업주)에게 헐값에 빌린 부평 농장에 정착한 나는 일단 온실 만들기에 나섰다. 알로에 아보레센스와 사포나리아는 묘목을 그루 당 1,200∼1,500원에 구했다. 여기 저기에서 돈을 융통한 나는 그럭저럭 온실 2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온실 하나에는 1,000그루 정도를 심었다.
그러나 노모와 아이들은 여전히 부산에서 따로 살 만큼 경제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내 생계도 꾸려야 했다. 다시 묘목과 씨앗 보따리 장수로 되돌아갔다. 원래 사막에서 자라는 알로에는 물을 싫어하고 생명력이 강해 일주일에 한 두 번만 관리해도 됐다. 아는 원예업자들이 많은 경남 진주를 주로 오갔다. 그나마 장사 요령이 생긴 덕인지 굶지는 않았다. 생활비를 하고도 남아 알로에 농장 운영에 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알로에를 수확할 시기가 왔다. 알로에는 보통 묘목을 심은 지 3년 정도면 복용이 가능하다. 묘목 크기에 따라서는 1년 이내에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마땅한 판로가 없던 나는 각종 병을 앓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그런데 알로에를 그냥 쓰레기통에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좋은 알로에를 그냥 버리다니…." 억장이 무너지듯 참담했다.
물론 효과를 봤다며 '성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산에서 교회를 다니던 70년대 중반 만났던 30대 여성은 저혈압과 생리불순이 사라졌다며 내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같은 푼돈으로는 농장을 유지·발전 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79년 2월 내 일기장엔 "엄동설한이 짙어간다. 꽃피는 봄은 정녕 가까운 것인가"라고 씌여 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했지만 알로에 사업은 내게 1년 내내 엄동설한의 찬바람만 안길 것 같았다.
자금난에 쪼들린 나는 부산 동래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던 애희 누나를 찾아갔다. 알로에 베라를 수입하기 위해 손을 내민 지 3년 만인 79년 5월 무렵이다. 애희 누나는 "지성이면 감천이겠지"라는 한 마디만 던진 채 500만원을 선뜻 내주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내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느님 뜻대로 되겠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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