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결혼사진 한 장이 없다. 돌이나 회갑사진은 말 할 것도 없다. 사진관이면 당연히 전시돼 있게 마련인 그런 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인물 뿐이다. 그 틈 사이에 자리잡은 가족사진이 오히려 낯설다. 창업 반세기, 3대째 대를 이어 가고 있는 김스튜디오의 풍경이다."사진작가는 꿈을 만들어주는 직업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남기고 싶어합니다. 작가는 그런 순간을 포착해서 꿈을 파는 사람입니다." 인상사진작가 김헌(金憲·61)씨는 사진작가의 존재이유를 그렇게 풀이한다.
인상사진(또는 초상사진)은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장르다. 사진관은 바로 인상사진을 업으로 삼는 업소다. 그런 점에서 김스튜디오는 여느 사진관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돌, 결혼, 환갑 등 돈 되는 관혼상제 사진은 창업자 시절부터 외면해왔다. 심지어 가족사진도 복장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손님을 돌려보내기 일쑤다. 얼굴을 중심으로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창조하는 순수인상사진의 전통을 고집한다.
김헌씨는 현재 스튜디오를 아들(敏赫·31)에게 물려주고 충북 제천에서 과수원을 가꾸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단지 중앙대 예술대 프로인상사진과 주임교수로 매주 한번 강의를 위해 서울나들이를 할 뿐이다.
김스튜디오의 모태는 54년 그의 부친(金永尙)이 용산구 남영동 수도여고 근처에 창업한 수도사진관이다. 10년 뒤 명동입구 코스모스백화점 맞은 편으로 옮기면서 명동스튜디오, 3대 대물림 과정에서 김스튜디오로 바뀌었다.
김헌씨의 꿈은 원래 공학도였다.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자는 대물림 하듯 서울대 공대에 낙방했다. 부자의 운명이었나 보다. 사진을 천직으로 삼으라는…. 김헌씨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예술대) 사진과 1회 졸업생이다. 대학 후배인 아들은 대학원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이기도 하다.
"용산중학 입학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뒤 신이 나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뭔가 큰 선물을 기대한 거지요. 하지만 꿈은 곧 산산조각 났습니다. 아버지는 '똑똑하다니까 다행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학비와 용돈은 스스로 해결해라'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말을 하더군요." 그는 "사진관 일을 도우면 용돈을 주겠다"는 부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아르바이트가 천직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68년 농협중앙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새농민' 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마치 장기수가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는 듯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서 였다. 10년 뒤 진로그룹으로 옮겨 부친이 세상을 떠나던 86년까지 근무했다.
황해도 곡산이 고향인 그의 선친은 일본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도쿄 이노우에 사진관에서 수업했다. 광복 뒤 귀국한 그는 춘천에서 동업으로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54년 독립한다. 선친은 81년 서울인상사진연구회 창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월간 사단(寫壇)을 창간, 본업보다 인상사진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힘을 쏟았다.
선친이 운영하던 명동스튜디오는 건평이 13평에 불과했다. 기본장비를 갖추는데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표준렌즈(50∼55mm)로 사람의 모습을 왜곡현상 없이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두 배 이상인 강초점렌즈(130mm)를 장착한 카메라가 필수적이다. 스튜디오의 넓이가 최소한 17평 정도는 돼야 한다. 강남구 압구정동 김스튜디오는 17평 크기의 작업실 2개를 갖추고 있다.
"아버님은 삶에 대한 이해와 폭 넓은 지식이 뒷받침돼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실은 없었죠. 오죽하면 저에게 사진의 의미는 가난으로 다가왔으니까요." 김스튜디오는 창업자 시절부터 상업적 운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다. 그런 전통이 유일하게 깨진 적이 있다. 며느리를 맞던 날 김현씨는 생전 처음으로 결혼사진을 직접 찍었다.
장인정신을 김헌씨는 90년 가격경쟁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값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제값받기'를 선언한 것이다. 그만큼 자기작품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얼굴사진 한 점에 30만원을 매겼다. 그의 목표는 최소한 100만원이었다.
현역시절 그의 촬영대상은 주로 예술인들이었다. 한국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은 생전에 그를 아들처럼 여겼다. 병상으로 면회를 간 그를 껴 안으면서 "김군, 나 스물 여덟 살로 가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김자경은 그의 사진에서 스물여덟 꽃다운 시절의 모습을 변함없이 느꼈다. 나이를 잊게 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 것이다.
그는 200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사진가협회가 수여하는 명장(Master of Photography Degree)의 칭호를 획득했다. 이에 앞서 96년 메조소프라노 김학남씨를 모델로 한 작품 '백조의 여인'을 비롯, 미국프로사진가협회 공모전에서 3회나 수상했다.
아들 민혁씨는 중앙대 예술대에 수석 합격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아들은 아버지와 10년 넘게 공동작업을 하면서 인상사진분야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노력을 해왔고 그 결과를 석사논문에 담아냈다.
순간을 하나의 공간 속에 가둬두는 상자, 그 것이 카메라다. 누군가 카메라의 경이로움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 경이로움도 올바른 눈을 가진 작가를 만날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김헌씨는 아들에게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필름수정술 국내 최고 미학적 입체감 살려내
김스튜디오는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리터칭(Retouching)기법을 보유하고 있다. 리터칭기법은 필름수정술을 말하는데 사진기술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해왔다. 리터칭은 붓이나 연필, 나이프, 조명기구 등 도구를 사용해 얼굴의 명암과 선을 교정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재현하고 돋보이게 하는 작업이다. 흔히 실물보다 잘 나왔다고 하는 사진은 이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사람들이 얼굴에서 가장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노화의 흔적이다. 눈, 코, 입주위의 주름이나 근육의 늘어짐 현상이 사진에 그대로 반영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얼굴의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노화의 흔적과 흉터를 없애거나 완화하는 과정도 리터칭의 영역이다. 리터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해부학 골상학 미학 등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브리지 라이트(Bridge Light)는 리터칭의 중요한 도구다. 얼굴을 구성하는 각 부위의 면이 뭉치는 현상을 방지해주는 보조조명장치로 동양인 촬영에 필수적이다. 넓고 평면적인 얼굴모습을 갸름하게 다듬어주거나 광대뼈가 높고 볼 근육이 발달된 얼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즉 얼굴의 미학적인 입체감을 살려내는 도구다.
동양인은 사진학적으로 그 모습을 재현하는데 제한을 받는다. 얼굴의 음영이 뚜렷하지 않은데다 입체감이 부족한 탓이다. 인상사진의 기법과 장비는 서양인을 기준으로 발전해왔다. 이를 동양인에게 적용하면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
리터칭기법은 70년대 중반 컬러시대의 도래이후 국내에서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흑백은 리터칭기법을 적용하지 않으면 실물보다 더 늙고 추한 결과를 낳지만 컬러사진은 흑백보다 명암의 차이가 적어 그런 결점이 많이 보완된다. 또 노력과 시간이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리터칭을 외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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